고건혁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서울시의 정치보다
여러 평당원들에 의한
봉천동의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여러 평당원들에 의한
봉천동의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대학 1학년이던 2000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더 평등하게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들 중에 가장 설득력 있던 게 진보정당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을 두고 ‘개량’이라고 비판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의회정치는 장식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권력자들의 시혜에 의한 조그마한 개선밖에는 없다는 게 그이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프로그램 없이 근본적인 신자유주의 반대 주장만 외치며 자족하기보다는, 진보정당을 통해 의회에 개입하여 그이들이 얘기하는 조그마한 변화라도 이루는 게 훨씬 나아 보였다.
더욱이 진보정당 운동은 기존의 정당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다. 진성 당원들에 의해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진보정당 체계는 이전에 비해 확실히 진전된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고 봤다. 평당원에 불과한 선배들이 양성 평등 문제에 대해 언제든지 당 대표와 직접 면담하고 자신의 의사를 관철할 수 있는 게 진보정당이었다.
무엇보다 매혹적이었던 것은 선거 기간에만 정치가 이뤄지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진보정당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에선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술집과 당구장 위층에 당 사무실이 있는데 동네 사랑방처럼 그곳을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들락거린다던 어느 선배의 얘기는 일상과 정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멋진 그림이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열풍에 힘입어 민주노동당 후보들이 국회에 진출했을 때만큼이나 창당 초기부터 각 지역에서 꾸준하게 진행해온 학교급식조례 제정운동이나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운동이 성과를 거뒀을 때 흥분했다.
나에게 진보정당이란 (당시는 지구당이라 불렸던) 지역위원회들이었다. 정당이 지역 주민들을 직접 만나서 정책을 알려나가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곳. 그곳을 통해 지역에서 변화를 만들어나가던 이들을 만났고,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자전거 타고 출퇴근하고 밥을 사무실에서 지어 먹으며 행복한 삶을 살던 한 부부에게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생계 문제의 한계를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영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칠할의 게으름과 삼할의 생업 문제로 인해 당원에서 당비만 내는 후원회원처럼 되어 버리는 동안, 나의 당은 두 개로 나눠졌다. 그리고 진보신당의 방향에 동의하여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내가 정작 입당은 차일피일 미루며 심정적인 당원으로 빈둥거리는 동안 이제는 진보신당마저 쪼개질 상황이다. 현실적인 생존 때문에 재통합이 필요하다는 쪽과 진보정치의 방향성을 명확히 유지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가야 한다는 쪽, 둘 다 이해가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결국엔 모두 다 쪼개지고 흩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청렴하고 능력 있는 어느 명망가에게 위임한 서울특별시의 정치보다는 여러 평당원들에 의한 봉천동의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나에게 새로운 정치의 희망은 진보정당에 있다. 대학시절 진보정당 운동을 급진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하던 이들 중 다수가 제 살길을 찾아 주류사회로 편입하는 동안 지역위원회에서 꿋꿋하게 자리를 지켜온 선배들을 비롯해 지역에서 진보정치를 실현해왔던 이들을 생각하면 여기서 모든 게 끝나지는 않을 거 같다. 더욱이 계속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회당도 있고. 아마 그들이 품은 불씨가 쉽게 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나 같은 엉터리 당원이 그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움직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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