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문화평론가
정의 실현은 기쁘나 그 실현의 방식은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했다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했다
지금은 누구나 카다피를 비난하나, 한때 그는 제3세계의 영웅이었다. 1980년대에는 그의 저서(<그린 북>)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널리 읽히기도 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시절 그는 국내의 일간신문에 리비아 혁명을 선전하는 전면광고를 싣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시민군들에게 짐승처럼 끌려다닌다.
동영상 속의 그는 린치를 당한 듯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다. 그래도 목숨은 붙어 있는지 힘없는 손으로 그 피를 닦아낸다. 하지만 잠시 후 화면에 다시 나타난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살해된 그의 사체는 성난 군중의 손에 질질 끌려다니다가 결국 어느 정육점의 냉동창고로 옮겨져, 거기서 대중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차우셰스쿠의 최후를 담은 기록영상이 기억난다. 변호사조차 없는 비밀재판의 결과야 뻔한 것. 놀라운 것은 외려 형 집행의 속도였다. 선고가 끝나자마자 그와 그의 부인은 곧바로 법정의 마당으로 끌려나가 거기서 처형당했다. 영상의 마지막 자막이 기억난다. “루마니아의 민주주의는 스탈린주의 재판으로 시작됐다.”
두 독재자는 여러 면에서 한반도의 독재자들을 닮았다. 가령 카다피는 쿠데타로 집권하여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점에서 박정희와 통하고, 차우셰스쿠는 항독 레지스탕스를 바탕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점에서 북한의 김일성을 닮았다. 유럽의 공산국가에서 보기 힘든 루마니아의 개인숭배 역시 차우셰스쿠가 북한에서 배워온 것이라 한다.
한반도의 독재자들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얼마 전 공개된 김재규의 녹음테이프에 따르면, 궁정동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서울에서 소요가 일어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그때 차지철은 “30만을 죽여도 끄떡없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박정희의 최후도 아주 험했을 게다.
차우셰스쿠와 달리 김일성은 인민의 오열 속에 행복한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이번에 카다피의 최후를 보는 심정이 남다를 게다. 카다피는 군사·경제·외교 측면에서 김정일의 절친한 친구. 게다가 ‘서구 제국주의’의 군사적 개입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자기가 다스리던 인민에게 처형당하는 시나리오가 어디 남의 얘기겠는가?
인민들은 복수할 권리가 있다. 스탈린주의자 차우셰스쿠를 스탈린주의 재판으로 처형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거야말로 공정하지 않은가? 카다피의 정치범들 역시 친위대의 손에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반대자를 재판 없이 처형한 자를 현장에서 즉결처분하는 데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거야말로 공정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 힘도 없는 노인에게 린치를 가하고, 사체를 질질 끌고 다니다가 정육점 냉동창고에 갖다 놓고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까지도 ‘정의’일까? 정의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의미한다면, 가령 토막살인범은 똑같은 방식으로 처형해야 마땅할 것이다. 카다피의 죽음은 인민의 해방을 의미하나, 저 잔혹성은 그다지 민주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에 대학 캠퍼스에 광주에서 학살당한 사체들의 사진이 전시된 적이 있다. 그 잔혹함을 가감 없이 그대로 공시한 것은 물론 군부독재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해서였을 게다. 하지만 잔혹성도 웬만해야 ‘독재’에 대한 정치적 분노를 자아내지, 정도를 넘으면 외려 ‘인간’ 자체에 대한 철학적 회의만 낳게 된다. 리비아 잔혹극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정의가 실현된 것은 기쁜 일이나, 실현의 방식은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했다. 이 과도한 잔혹함은, 독재냐 민주냐의 차원을 넘어,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끼게 만든다. 예수의 말대로, “주여, 저희는 저희가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80년대에 대학 캠퍼스에 광주에서 학살당한 사체들의 사진이 전시된 적이 있다. 그 잔혹함을 가감 없이 그대로 공시한 것은 물론 군부독재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해서였을 게다. 하지만 잔혹성도 웬만해야 ‘독재’에 대한 정치적 분노를 자아내지, 정도를 넘으면 외려 ‘인간’ 자체에 대한 철학적 회의만 낳게 된다. 리비아 잔혹극도 마찬가지다. 거기에 정의가 실현된 것은 기쁜 일이나, 실현의 방식은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했다. 이 과도한 잔혹함은, 독재냐 민주냐의 차원을 넘어,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끼게 만든다. 예수의 말대로, “주여, 저희는 저희가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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