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라 울산 경의고 교사
퇴근길을 서두르다 항상 들르던 단골 주유소를 지나쳐 버려 고속도로 입구에서 급하게 주유소를 찾아 차를 세웠다. 유리창을 내리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카드를 내미는데 문득 “어?” 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5~6년 전 졸업앨범 속 낯익은 학생이 이제 청년이 된 모습으로 “선생님!” 하고 활짝 웃는다. 뜻하지 않은 만남에 반가워하면서 어쩐 일이냐고 안부를 물으니, 제대 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 중이라며 덤덤하게 웃는다. 첫 번째 웃음은 환했는데, 두 번째 웃음은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 그래서인지 애틋하다. “선생님, 이렇게 뵈니 진짜 반가워요. 와, 학교 생각 나네요.” 싹싹하게 인사를 덧붙이는 제자. 학교 다닐 때는 조용하기만 한 모범생이었는데 대학생 되고 서글서글해졌다며 어깨를 툭 치니, 돈 벌고 학교 다니고 돈 벌고 학교 다니고 그렇게 바쁘게 지낸다면서 더 씩씩하게 대답한다. 며칠 새 차가워진 저녁 바람 속에 직원 잠바를 여며 입은 모습이 시큰해서, “저녁이라도 사줄까? 언제 마치니?” 하고 물으니 열한시란다. 금요일 열한시, 한창 도서관에 불이 켜져 있거나 대학로 술집이 시끌벅적할 시간이다. “다음에 또 들르세요. 일찍 오시면 세차해 드릴게요” 하고 손을 흔드는 제자의 모습이 멀어진 다음에도, 제자의 목소리가 눈길의 발자국처럼 꾹꾹 남는다.
그 학생은 성적이 우수했고 국립대로 진학했다. 마침 그 학과 조교가 아는 선배여서 장학금이나 다른 지원을 왜 못 받느냐고 물었더니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장학금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성적인데 기숙사에 못 들어가서 자취를 하자니 생활비 때문에 휴학을 한다는 거였다. 부모님 건강 때문에 집에서 전혀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서, 입학 이후 지금까지 혼자 힘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입고 꾸미는 것에 무덤덤한 남학생이라도, 요즘 대학교 근처에 방을 구하고 밥 세끼를 사 먹거나 해 먹으며 공과금 쪼개어 내고 교재도 사고 학원도 다니려면, 문화생활 포기하고 술자리 안 가고 휴대폰 아껴 써도 매달 생활비가 족히 수십만원에 이른다. 등록금 문제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이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간혹 마주친다. 병원 응급실에서, 은행에서, 백화점 매장에서, 커피숍 카운터에서…. 그 덕분에 그 시절 다른 아이들의 소식도 건너 들으며 안부를 묻곤 한다. 자신의 학과나 진로대로 취업을 한 제자들도 있지만 타지에서 대학생활이 버거워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일찌감치 직장인이 되어 열심히 살아가는 제자들도 많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전공을 버리고 고시텔에서 학원 수업을 들으며 임용고시나 공무원 준비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그 아이들이 학기 초에 진로희망을 적어내고 상담을 할 때 얼마나 눈이 반짝거렸는지,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삼년 동안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하다. 한 학기 100만원이 안 되는 등록금으로 대학을 다녔던 나는 더 이상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대학생활의 설렘을 심어주지 못하겠다. 입학과 동시에 천문학적 학비와 생활비로 엮인 긴 터널 속으로 발을 내디딜 아이들이나, 국어시간에 말하기 한번 제대로 시켜보지 못하면서 수능에 반영된다고 하는 <교육방송>(EBS) 교재를 떠안고 끙끙거리는 나나, 왜 이렇게 해서 대학을 가야만 하는지 해답을 찾지 못한 채 수능을 앞두고 있다.
“은행권, 10%대 금리 대학생 대출 검토”라는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을 때, 어리석게도 나는 10%가 대학생에게 높은 금리여서 인하를 검토한다는 의미인 줄 착각했다. 하지만 “현재 연 30%에 달하는 금리를 연 20%로 낮추고” “연 금리 10%대의 대학생 전용 대출상품을 개발하기 위해 검토에 나섰다”는 기사 내용을 읽으면서, 무섭고 슬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맥으로 보면 10%는 저금리 상품이라는 뜻이다. 30%나 20%에 비해서는 당연히 그렇다.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나는, 어른들에게 묻는다. 숫자에 어두운 누가 보기에도 10%가 저금리인가?
다시, 사회에 묻겠다. “금감원은 저축은행중앙회에 공문을 보내 대학생 대출 용도를 학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자금으로 제한”할 것을 당부했다고 하는데, 대학생들이 왜 돈을 빌려야 하는지 정말로 모르는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가, 그것도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가. 사회가 오직 개인의 몫으로만 떠넘긴 학비, 대학에 학생이 ‘돈을 내고’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뿐 ‘학생이 대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전혀 배려해 주지 않는 교육 여건 탓에 학생 스스로 쥐어짜내야 하는 생활비, 그리고 공부와 아르바이트의 고단하고 깊은 틈 속에서 이따금 친구와 마주 앉아 마시는 캔커피 또는 소주 한잔을 위해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