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아무리 철천지원수라도 이웃집에 불나기를 바라는 건 바보다. 인도적인 이유에서도, 공익적 차원도 아니다. 단지 내 집에 옮아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난 이웃집에 부채질하는 건 미치광이고, 팔짱 끼고 불구경하는 것도 멍청이다. 이웃집에 불이 나면 무조건 불부터 끄고 봐야 한다. 지혜롭다면, 구원에 매이지 않고 안전관리에 만전을 기했을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별칭은 당중앙이다. 북 체제의 중앙이다. 졸지에 중앙이 사라졌으니, 북한으로선 집안에 불이 붙은 것과 다르지 않다. 내부가 안정돼 있다면 스스로 진화되겠지만, 당중앙의 공백 속에서 안정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평소 김 위원장과 북 체제를 증오하고 멸시했던 미국·일본 등이 그의 죽음 앞에서 말을 아끼며 예의주시하는 것은 불길이 어떻게 번질지 모르는 까닭이다. 하물며 바다 건너 나라들이 그러한데, 처마를 마주 대고 있는 우리 처지에선 어찌해야 하나.
다행히도 우리에겐 반면교사의 선례가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다. 수령은 혁명의 뇌수에 해당하니, 체제가 뿌리째 흔들리는 대변고였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쾌재를 부르며 즉각 전군 비상경계령을 발동했다. 이어 경찰 갑호비상령, 전 공무원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국가안보회의에 이어 긴급 국무회의는 물론 전면전에 대비하는 데프콘을 한 단계 격상했다. 조문 논의엔 국가보안법의 칼을 들이댔다. 불난 집에 풍로질을 해댄 셈이다. 제집까지 다 태울 수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실제 북한군 총참모부는 최고 경계태세를 내리고 군사적 충돌을 경고했다.
김영삼 정부의 이런 압박정책의 배경엔 북한 붕괴론이 있었다. 5년 안에 주저앉을 것이니, 전면적 압박을 통해 그 시기를 앞당기자는 것이었다. 냉전 모험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게 붕괴론이었고, 마찬가지로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결과는 치명적이었다. 남북관계의 파국과 신인도 추락, 국제적 따돌림 등 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기대가 잔뜩 섞인 붕괴론 전망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무모하게도 그런 전망에 국가의 존망을 거는 짓이었다. 냉정한 정부라면 분석·전망에 앞서 당장 국가와 국민에게 절실한 게 무엇인지 따졌을 것이다. 이웃의 불이 진화될 것인지, 아니면 집이 전소될 것인지는 두번째 과제다. 가장 긴급한 것은 내 집의 안전이다. 설사 전소를 바란다 하더라도 불길이 제집으로 번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북의 급변사태가 남쪽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게다가 우리 정부는 한반도 평화 관리의 수단을 미국에 넘기다시피 했다. 급변사태시 미국과 중국과 쟁투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다행히 이명박 대통령은 김 위원장의 사망 소식 이후 일성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강조했다. 물론 이런 태도가 미국의 작용에 의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김 주석 사망 때와 같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위험한 도박은 피할 수 있게 됐다. 다만 이웃집 불을 팔짱 끼고 쳐다만 보는 형국이어서 유감스럽다. 진실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바란다면 진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 이희호·권양숙씨 등 민간사절은 물론 정부 차원의 조문사절도 보내야 한다. 북쪽이 필요로 하는 물자도 제공해야 한다. 사실 지금은 인도적 차원을 떠나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기회다. 그동안 잃어버린 신뢰도 일거에 되살릴 수 있다. 진정한 실용주의자라면 이런 호기를 놓칠 리 없다. 미국·일본은 이미 인도적 지원 문제를 북쪽과 협의하고 있다.
이 대통령이 마음 같아선 나라까지 봉헌하고자 했던 예수는 이 하나의 계명으로 율법을 완성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종교에 기대서 관용을 채근하려는 게 아니다. 보스니아 내전의 현장에서 인간 내면의 야수성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경험했던 피터 마스의 저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상기시키고 싶다. “(평범한 이웃들이) 돌연 야수로 변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친구들과 이웃을 잔인하게 강간하고 살해한” 이야기다. 6·25전쟁의 비극이기도 하다. 이웃을 사랑하라! 지금 우리에겐 종교 계명이 아니다. 평화와 안정을 위한 준칙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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