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변호사.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① 1982년 검사시보 시절의 기억
피의자님은 정말 돈을 훔치셨나요?
노조 방해한 사쪽을 구속하자 지청이 시끄러워졌다
“네놈이 검사 하면 나라 망쳐”
피의자님은 정말 돈을 훔치셨나요?
노조 방해한 사쪽을 구속하자 지청이 시끄러워졌다
“네놈이 검사 하면 나라 망쳐”
1982년, 그해 겨울도 추위가 매서웠다. 그 추웠던 겨울 서울 변두리 검찰지청에서 검사시보로 일하던 때로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그 몇 달의 경험 속에는 나중에 겪게 될 나 자신과 법조와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다 들어 있다. 그때는 시보도 검사와 똑같이 사건을 인지하고 수사하고 기소할 수가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어제 불러놓은 구속 피의자들이 몇 명씩 대기해 있었다. 그 엄동설한에도 형편이 어려운 죄수들은 구치소에서 준 얇은 죄수복 하나로 한겨울을 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검사실, 따뜻한 방에 들어와서도 한동안은 꽁꽁 언 몸을 녹이느라 몸서리를 쳤다. 입에서는, 아니 몸속 저 안쪽에서부터 아침에 먹은 음식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비릿한 냄새가 났다. 따뜻한 방 안 공기와 섞여 숨쉬기가 곤란한 지경이었지만, 그 비릿한 냄새는 죄수들의 신산한 삶 그 자체였다.
처음으로 배당받은 사건은 평범한 절도사건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여리고 착해 보이는 18살 청년이 포승줄에 묶인 채 내 앞에 앉았다. 뒤에는 그를 조사한 형사가 앉아 있었다. 피의자는 나이와 이름을 묻자 대답을 못하고 몸을 벌벌 떨었다. 그렇지 않아도 첫 구속사건이라 나 자신도 극도로 긴장해 있던 터에 그가 턱까지 딱딱 마주치는 걸 보면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20살 안팎의 청년 셋이서 여관에서 같이 잠을 잤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그중 한명의 지갑에서 돈이 없어졌다. 지금 돈 가치로 따지면 한 십만원쯤 되었을까? 피해자와 다른 한명은 서로 친구 사이고, 나머지 한명은 이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크리스마스 근처 어느 날 밤 통행금지 직전 길에서 우연히 만나, 여관비를 나누어 냈다. 친구 사이인 둘 중 한명이 돈을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나머지 하나가 범인으로 몰렸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이 돈을 훔쳤노라고 자백을 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혼이 났던지 검찰청 내 앞에 앉아서도 턱을 딱딱 마주치고 몸을 벌벌 떤 거였다. 긴장하고 당황한 나는 나이 어린 피의자에게 지나치게 존대를 해가며 신문을 이어갔다.
“피의자는 정말 돈을 훔치셨나요?” 이렇게 묻자, 뒤에 앉아 있던 형사가 나를 흘끔 쳐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아차’ 싶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머릿속 생각뿐 내 입에서는 계속 존대가 흘러나왔고 그 청년의 입에서는 자신은 절대로 돈을 훔치지 않았다는 부인의 답변이 나왔다. 형사는 제가 해결한 사건을 내가 다 망쳐 놓았다는 표정이었다. 다음날 피해자와 그 친구를 조사하고 휴일인 새해 첫날에도 내 돈 들여가며 경기도 남양주시 장현에 있는 여관까지 찾아가서 주인의 진술을 들었다. 그 결과 여러 정황상 오히려 피해자의 친구가 범인이라는 판단이 섰다. 마지막으로 그 친구의 집 식구들 진술을 통해 확신을 가지게 된 나는 존댓말로 피의자를 신문하던 때와는 달리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무섭게 그 친구를 닦달했다. 그 친구가 범행을 막 자백할 듯, 할 듯 하다가 다시 부인을 하는 순간 그가 너무 가증스러워 ‘검사직무대리’라고 적혀 있는 명패를 들고 때릴 뻔하기까지 했다. 같은 방에 있던 검사서기는 불과 며칠 사이에 180도 변해버린 나를 보고 속으로 ‘너도 별수 없지’ 했을 게다.
형법은 무엇이 범죄인지를 밝힘으로써 범죄로부터 선인(善人)을 보호하는 법전이고, 형사소송법은 범죄를 저지른 악인(惡人)이라도 적법 절차에 따라 다룰 것을 보장해주는 악인을 위한 법전이다. 하지만 일부 경찰과 검사들이 범인을 잡아 응분의 벌을 줌으로써 사회정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서, 그리고 일부는 정치적 목적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또는 빨리 사건을 해결해서 책임을 면하거나 출세를 하려는 의도에서 악인의 법전인 형사소송법을 무시하고 명패를 들어 피의자들을 내려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헌 회장, 한명숙 전 총리, 그밖의 많은 정치인, 기업인, 일반 서민들이 수사 과정에서 죽거나 심한 고초를 겪었다.
그 절도사건은 결국 피해자 친구의 자백을 받지 못했고, 피의자였던 18살 청년은 무혐의로 석방됐다.
얼마 뒤 검찰지청 검사로 있던 선배 몇 분이 친구 사업가가 초대한 술자리에 나를 데리고 갔다. 난생처음으로 강남에 가서 양주라는 걸 마시게 되었는데, 막 지은 서초동 법원 앞에 호박밭이 있던 시절이었다. 양주가 어느 정도 독한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선배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셨다. 어느 순간 정신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철창이 있는 방에 갇혀 있는 거였다. 소리쳐 사람을 불렀더니 밖에서 “너 이 새끼, 조용히 못해” 하면서 욕설이 이어졌다. 그제야 여기가 동네 파출소 유치장이란 걸 알게 되었다. 좀 내보내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들은 체도 안 했다. 다급해진 나는 사법연수생 신분을 밝혔고 그러자 상황이 확 바뀌었다. “아, 진작 말씀하시지….” 눈이 엄청 쌓인 영하의 추운 겨울밤에 전봇대를 붙들고 졸고 있는 주정뱅이를 순찰하다 보고는 파출소에 데려다 보호한 거라 했다.
즉시 석방되어 집에 와 잠깐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고 출근을 했다. 시장에서 리어카를 훔치다 잡혀온 중년남자가 내 책상 앞에 대기중이었다. 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범행 당시 너무 술에 취해 있어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변명을 했다. 더 추궁을 할 수가 없었다. 나 역시 술 때문에 지난밤 일이 잘 생각나질 않았다. 내 눈은 토끼처럼 빨갛고 온몸에서는 술 냄새가 풀풀 났다. 절도범은 나를 보고 계속 실실 웃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었다. 스폰서 접대에 제대로 한번 편승했던 셈이다.
며칠 뒤 택시회사 노조위원장이 업무상 횡령 혐의로 구속되어 왔다. 그 회사는 수백대의 택시를 굴리는 큰 회사였다. 당시는 노동조합운동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도시산업선교회 등 진보적 개신교의 지원으로 여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극히 부분적인 노조활동이 있었을 뿐이다. 대기업이나 남성 노동자들의 노조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뒤에야 비로소 자리잡기 시작했다. 노조가 있다면 모두 회사 쪽이 뒤에서 조종하는 어용노조였다.
그 택시노조 역시 그랬다. 사측은 말 잘 들을 성싶은 사람을 노조위원장 자리에 앉혔다. 업무상 횡령죄로 잡혀 온 노조위원장은 동종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일부러 약점이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그 자리에 앉힌 거였다. 그런데 이 사람 성품이 온순하고 착하고 줏대도 별로 없었다. 당시 회사의 한 임원이 운전기사들을 함부로 대하고 조그마한 요구도 가차없이 잘라버려 원성이 극에 달해 있었다. 비록 노조가 유명무실하기는 했지만 기사들은 새로 온 노조위원장에게 당신이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거 아니냐고 날마다 다그쳤다. 위원장은 눈이 둥그렇게 크고 소처럼 온순한 인상이었다. 그는 노조원들의 주장이 잘못되거나 지나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하자는 대로 벽에다 요구사항도 써 붙이고 노조 회의도 소집했다. 사측에서는 철석같이 믿고 있던 바보 같은 노조위원장이 앞장서서 엉뚱한 일을 벌이자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노조 벽보를 찢고 회의를 못하게 막고 위원장을 협박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업무상 횡령죄로 고소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택시업계는 완전한 형태의 고용노동이라 보기 어렵다. 당시 하루에 3만원가량을 사납금으로 입금해야 일정 수준의 월급이 나왔다. 하루 수입을 모두 회사에 입금하고 제대로 된 월급을 받는 완전월급제는 택시업계의 오래된 화두일 뿐 지금도 절반 월급, 절반 도급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납금이란 게 일을 해야 납부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일을 하더라도 사납금만큼 벌지 못하면 그만큼 월급에서 제하면 되는 것이지, 사납금에 미달하는 금액만큼을 횡령했다고 할 수는 없다. 애초에 위원장은 전임으로 노조 일을 했기 때문에 수입이 전혀 없어서 횡령이 성립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납금만큼을 횡령했다고 고소를 하고 검사가 신청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발부되었다.
법리상 당연히 횡령죄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아는 선배 판사를 찾아가 개인적으로 이 법리를 재확인해 두었다. 그리고 고소인인 회사 임원을 소환해서 피해자 진술을 받는 과정에서 노조 벽보를 찢고 욕설을 하고 노조 회의를 막은 사실을 확인받았다. 그 즉시 그 임원을 횡령 피해자가 아닌 노동쟁의조정법상의 노조활동방해 피의자로 입건했다. 그러자 지청이 시끄러워졌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 검찰이 노조 편에 서서 사용자 쪽의 불법을 수사하는 것은 전혀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용노조 위원장으로 출발했던 그가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고 노조원들의 앞장을 서는 엉뚱한 일을 벌였던 것처럼, 나도 일개 시보 주제에 앞뒤 모르고 엉뚱한 일을 벌였다. 내가 자신들 편이라 믿고 매일같이 노조원들이 방에 찾아와 진을 쳤다. 회사에서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커다란 덩치의 선물꾸러미를 들고 집에까지 찾아왔다. 마침내 조사를 마친 뒤 노조위원장은 무혐의 처분으로 의견을 올렸고, 회사 임원은 구속했다. 지청 관내 굴지의 택시회사 임원을 노조활동 방해 혐의로 구속시키는 게 시보 혼자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시 최종 결재권자였던 차장검사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이 당시 한 지청 간부급 검사는 나에게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너 같은 놈이 검사가 되면 나라가 망한다.” 더 험한 말이 이어졌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화장실에 들어가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을 근거로 그 사건은 내 손에서 떠나갔다. 무혐의 석방을 하려던 노조위원장은 구속기소되었고, 내가 구속했던 회사 임원은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이게 웬일인가’ 하며 내 방을 드나들던 노조원들은 모두 다 ‘역시 그렇지, 뭐’, 가슴에 커다란 상처를 안고 뿔뿔이 흩어졌다. 돌이키면 나 역시 지금도 아픔이 마음 가득하다. 첫 사건인 절도 피의자를 무혐의 처분하고 노조 사건에서 사측을 구속할 때 뒤에서 밀어주었던 차장검사 그분은 몇 년 뒤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겨울이 다 갈 무렵 어디를 가느라 지하철을 탔다. 자리에 앉아 맞은편을 바라보는데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이 청년, 아주머니, 아저씨 할 것 없이 모조리 죄수로 보이기 시작했다. ‘저들에게 퍼런 죄수복을 입히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을 하고 있는 나를 돌아보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겨우 몇 달에 이게 무슨 꼴이람.’ 그 간부검사 말마따나 검사라도 되었으면 나라까지는 몰라도 내가 망했을 터였다.
삼십년 가까운 검사 생활을 마치고도 따뜻하고 겸손한 품성을 유지하는 친구들을 본다. 하지만 대개 판검사고 국회의원이고, 자신의 그릇으로 감당할 수 없는 자리는 결국 그 자리가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이 오면서 말 많고 탈 많았던 그래서 배우고 느낀 바도 많았던 검사시보 시절도 끝이 났다.
그 택시노조 역시 그랬다. 사측은 말 잘 들을 성싶은 사람을 노조위원장 자리에 앉혔다. 업무상 횡령죄로 잡혀 온 노조위원장은 동종 전과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일부러 약점이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그 자리에 앉힌 거였다. 그런데 이 사람 성품이 온순하고 착하고 줏대도 별로 없었다. 당시 회사의 한 임원이 운전기사들을 함부로 대하고 조그마한 요구도 가차없이 잘라버려 원성이 극에 달해 있었다. 비록 노조가 유명무실하기는 했지만 기사들은 새로 온 노조위원장에게 당신이 앞장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거 아니냐고 날마다 다그쳤다. 위원장은 눈이 둥그렇게 크고 소처럼 온순한 인상이었다. 그는 노조원들의 주장이 잘못되거나 지나친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하자는 대로 벽에다 요구사항도 써 붙이고 노조 회의도 소집했다. 사측에서는 철석같이 믿고 있던 바보 같은 노조위원장이 앞장서서 엉뚱한 일을 벌이자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노조 벽보를 찢고 회의를 못하게 막고 위원장을 협박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업무상 횡령죄로 고소를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택시업계는 완전한 형태의 고용노동이라 보기 어렵다. 당시 하루에 3만원가량을 사납금으로 입금해야 일정 수준의 월급이 나왔다. 하루 수입을 모두 회사에 입금하고 제대로 된 월급을 받는 완전월급제는 택시업계의 오래된 화두일 뿐 지금도 절반 월급, 절반 도급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사납금이란 게 일을 해야 납부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일을 하더라도 사납금만큼 벌지 못하면 그만큼 월급에서 제하면 되는 것이지, 사납금에 미달하는 금액만큼을 횡령했다고 할 수는 없다. 애초에 위원장은 전임으로 노조 일을 했기 때문에 수입이 전혀 없어서 횡령이 성립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납금만큼을 횡령했다고 고소를 하고 검사가 신청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발부되었다.
1982년 가을 검사시보 시절. 위 사진 맨 뒷줄 오른쪽이 필자. 가운뎃줄 왼쪽은 사법연수원 동기인 강금실 변호사. 김형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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