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애국을 택하자니
자유가 울고,
자유를 택하자니
애국이 운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에 대해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개인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국가는 결코 개인 위에 군림하거나 개인을 초월하여 존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국가가 공공성을 빙자해서 시장을 규제하거나, 노동자 보호정책을 취하거나, 사회보장을 추진한다면 이는 곧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개인들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인 임금에 근로소득세를 부과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노동착취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감세는 정의로운 것이며 증세나 사회보장의 강화는 자유주의 국가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의 국민에 대한 의무 강요는 독재국가나 할 짓이라는 것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의 주인공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이 안에 빨갱이 명단이 다 들어 있다”며 자신의 가방을 흔들어대며 기염을 토할 때 실은 그 안에 위스키 한 병 달랑 들어 있었던 것처럼, 프리드먼 역시 대공황기 실직자 시절 정부의 실업구제 정책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그저 ‘허무개그’처럼 들린다. 어쨌거나 반세기가 넘도록 개발과 성장만을 살길로 알아온 우리에게 프리드먼의 주장은 그리 낯설지 않다. 국가가 앞장서서 노동탄압과 재벌비호를 일삼고, 복지는 나라를 거덜내는 퍼주기이니 애들 밥그릇도 차별해야 한다고 생난리를 치던 게 바로 오늘의 한나라당(이젠 새누리당이란다)과 그 정권 아니었던가. 조중동이나 전경련, 경총이 그토록 받들어 모시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마저도 무릎 꿇은 신자유주의, 그것의 정통 원조 밀턴 프리드먼은 죽은 지 몇 해가 지났어도 여전히 이 땅에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런데 프리드먼이 유난히 강조한 ‘자유’는 어쩐 일인지 우리의 견결한 애국심을 당혹스럽게 한다. 광화문 네거리를 걷다가도 국기 하강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라도 하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거수경례를 올려붙여야 했고, 하다못해 음습한 변두리 영화관에서 <애마부인>과 <뼈와 살이 타는 밤>을 즐기려 해도 일동 기립하여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해야만 했던 게 우리네의 충성스러운 애국심 아니었던가. 뿐만이랴. 기본권의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임에도, 국가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주권자인 국민을 고소하는 주객전도의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천안함 사태를 놓고는 헌법재판관 후보자에게 신뢰 수준만으로는 못 미덥다며 확신의 국가관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그 애국심, 프리드먼이 말한 ‘독재국가’ 찬양을 넘어 가히 우상숭배와 필적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프리드먼은 국가의 국민에 대한 의무 강요는 독재국가나 하는 짓이고, 세금 추징도 국가의 개인에 대한 노동착취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즉 납세의 의무도 일종의 국가의 노동착취라는 얘긴데, 그렇다면 징병제는? 이십대의 창창한 청년들을 국방의 ‘신성한’ 의무라는 허울 아래 국가가 강제로 징집해서 그 용역을 통째로, 무상으로 갈취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의 자유와 가치는 국가의 그것보다 우선한다고 해야 앞뒤가 맞지 않겠나. 가스통들은 오해 마시라. 내 얘기가 아니라 프리드먼이,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프리드먼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주장에 비추어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유 대한민국 애국심의 심각한 공황상태 또는 파산을 확인한다. 애국을 택하자니 자유가 울고, 자유를 택하자니 애국이 운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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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울고,
자유를 택하자니
애국이 운다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자유’를 위협하는 국가에 대해 공공연하게 적대감을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개인들의 집합체에 불과한 국가는 결코 개인 위에 군림하거나 개인을 초월하여 존재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국가가 공공성을 빙자해서 시장을 규제하거나, 노동자 보호정책을 취하거나, 사회보장을 추진한다면 이는 곧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개인들의 정당한 노동의 대가인 임금에 근로소득세를 부과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노동착취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감세는 정의로운 것이며 증세나 사회보장의 강화는 자유주의 국가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국가의 국민에 대한 의무 강요는 독재국가나 할 짓이라는 것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의 주인공이자 알코올 중독자였던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이 안에 빨갱이 명단이 다 들어 있다”며 자신의 가방을 흔들어대며 기염을 토할 때 실은 그 안에 위스키 한 병 달랑 들어 있었던 것처럼, 프리드먼 역시 대공황기 실직자 시절 정부의 실업구제 정책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그의 이러한 주장은 그저 ‘허무개그’처럼 들린다. 어쨌거나 반세기가 넘도록 개발과 성장만을 살길로 알아온 우리에게 프리드먼의 주장은 그리 낯설지 않다. 국가가 앞장서서 노동탄압과 재벌비호를 일삼고, 복지는 나라를 거덜내는 퍼주기이니 애들 밥그릇도 차별해야 한다고 생난리를 치던 게 바로 오늘의 한나라당(이젠 새누리당이란다)과 그 정권 아니었던가. 조중동이나 전경련, 경총이 그토록 받들어 모시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마저도 무릎 꿇은 신자유주의, 그것의 정통 원조 밀턴 프리드먼은 죽은 지 몇 해가 지났어도 여전히 이 땅에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그런데 프리드먼이 유난히 강조한 ‘자유’는 어쩐 일인지 우리의 견결한 애국심을 당혹스럽게 한다. 광화문 네거리를 걷다가도 국기 하강식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라도 하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거수경례를 올려붙여야 했고, 하다못해 음습한 변두리 영화관에서 <애마부인>과 <뼈와 살이 타는 밤>을 즐기려 해도 일동 기립하여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해야만 했던 게 우리네의 충성스러운 애국심 아니었던가. 뿐만이랴. 기본권의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임에도, 국가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주권자인 국민을 고소하는 주객전도의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천안함 사태를 놓고는 헌법재판관 후보자에게 신뢰 수준만으로는 못 미덥다며 확신의 국가관을 강요하지 않았던가. 그 애국심, 프리드먼이 말한 ‘독재국가’ 찬양을 넘어 가히 우상숭배와 필적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프리드먼은 국가의 국민에 대한 의무 강요는 독재국가나 하는 짓이고, 세금 추징도 국가의 개인에 대한 노동착취에 다름 아니라고 했다. 즉 납세의 의무도 일종의 국가의 노동착취라는 얘긴데, 그렇다면 징병제는? 이십대의 창창한 청년들을 국방의 ‘신성한’ 의무라는 허울 아래 국가가 강제로 징집해서 그 용역을 통째로, 무상으로 갈취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자유주의자라면 개인의 자유와 가치는 국가의 그것보다 우선한다고 해야 앞뒤가 맞지 않겠나. 가스통들은 오해 마시라. 내 얘기가 아니라 프리드먼이,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프리드먼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주장에 비추어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유 대한민국 애국심의 심각한 공황상태 또는 파산을 확인한다. 애국을 택하자니 자유가 울고, 자유를 택하자니 애국이 운다.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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