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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시론] 구럼비는 존재의 터전이다 / 황규관

등록 2012-03-05 19:19

황규관  시인
황규관 시인
국가가 지켜주겠다는 게 무엇인가
누대로 이어져 내려온 강정마을
주민과 생명체는 거기에 포함되나
구럼비에 서서 구럼비 바위를 때리다 물러서다를 반복하는 바다는, 모든 생명체를 가능케 했던 영겁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누가 그랬더라. ‘나’라는 개체는 생명의 바다에서 튄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고. 바다는 우리의 정신에 죽음마저도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일지 모른다는 섬광이 지나가게 한다. 이어서 영원한 사랑이란 쉬지 않고 출렁이는 영혼의 상태일 거라는 막막함까지. 작년 여름에 존경하는 선생님들과, 그리고 함께 있으면 내내 웃을 수 있는 문우들과 구럼비에 잠깐 서 있었던 경험은 현실 세계가 아름다운 관계로만 짜져 있지 않다는 평범한 진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문제는 관계 자체가 아니라 관계의 특정 양식이라는 것. 그래서 어쩌면 싸움마저도 영원할지 모른다는 것. 사랑처럼 대상은 달라질지 몰라도 영혼의 상태로서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말이다.

강정마을에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겠다는 정부의 지난주 발표는 이제 분노를 일으키기보다는 말할 수 없는 비애를 느끼게 했다. 그래서 이제 시인들은 기도밖에 할 일이 없단 말인가 하는 황망한 심리상태에 도달하고 말았다. 참, 한심하기도 하지. 시란 물건이, 그리고 그것을 제작하는 장인이라는 시인의 역할이 제 가슴만 치는 일이라니. 사실 시인이라는 종족들은 정치적 실패자들인지도 모른다. 지난겨울 작가들이 임진각에서 강정마을까지 제주도의 평화를 기원하는 릴레이 종단을 하기도 했지만, 시가 현실을 얼마만큼 바꿔 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간 회의적인 것도 사실이다. 상상력이 존재의 소금이라는 말에 기대고 있는 정도라고만 해 두자. 아직까지도 우리의 생활은 바위 하나의 안위와 꽃 한 송이의 비극에 둔감한 게 사실이니까. 생명과 평화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시는 그래서 뜨거운 허무를 근원적으로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정마을에 기어이 짓고 말겠다는 해군기지가 품고 있는 진실이 국가의 안보도 아니고 아름다운 항구의 건설도 아님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름다움이 콘크리트로 도배된 강이나 바닷가라는 한심한 미학적 감수성도 그렇지만, 국가의 안보 운운에서는 소름마저 돋는다. 국가가 지켜 주겠다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누대로 이어져 내려온 강정마을 주민들과 구럼비의 시간만큼 유전되어 온 생명체들은 거기에 포함되어 있긴 한가? 사견을 전제하고 말한다면, 시는 비유적으로 말하는 표현양식이 아니다. 시는 차라리 거짓을 알몸으로 관통하는 어리석음이다. 역설적으로 그 어리석음은 국가는 결단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목숨 있는 것들을, 혹은 그것들의 소중한 터전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이명박‘들’은 특히 그렇다. 국가는 가축을 원하지 생명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 분류를 해놔야 거래가 가능하고, 처분이 용이하고, 폐기가 손쉬우니까.

따라서 구럼비를 부수고 강정마을에 수십척의 군함이 들고 나는 미래를, 멀지 않은 바다에서 함포를 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풍경을, 끝내는 거대한 미군 항공모함이 정박하는 몸서리를 상상하며 절규하는 일은 힘에 겹지만 당연히 시의 몫이다. 어머니의 걱정은 대체적으로 자식의 현재도 현재지만 미래이듯 말이다. 어쩌면 고통보다는 불안이 더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지도 모른다. 구럼비를 깨겠다는 국가는 영혼을 붕괴시켜 바다처럼 출렁이는 우리의 삶을 국가의 부속품으로 잡아두겠다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구럼비를 지키는 일은 단순히 지질학적으로 의미 깊은 풍경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선다. 구럼비는 바로 존재의 터전이다. 국가가 해체하여 길들이겠다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강물이, 논두렁이, 지렁이가, 원추리가 그렇듯이 말이다.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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