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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비굴해도 어쩌겠나, 날이 저무는데

등록 2012-03-14 19:23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나그네가 광야를 헤맨다. 돌연 들불이 일고 코끼리가 맹렬히 달려온다. 나그네는 도망치다 우물 속으로 뻗은 등나무 뿌리에 매달린다. 안도하며 아래를 보니 독룡이 입을 벌리고 있다. 사방엔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린다. 위에선 흰쥐 검은쥐가 뿌리를 갉는다. 들불은 등나무를 태우고,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내려와 쏜다. 문득 헤~ 벌린 입속으로 꿀 다섯 방울이 떨어진다. 그는 달콤함에 절명의 상황을 잊는다.

불가에 전하는 우물가 등나무(井藤) 이야기다. 코끼리는 생로병사라는 삶의 이치, 우물은 생사의 경계, 나무뿌리는 생, 독룡은 사, 4마리 독사는 죽어 돌아가는 흙 물 불 바람(4대), 흰쥐와 검은쥐는 낮과 밤(세월), 들불은 늙음과 병, 벌은 온갖 미망, 꿀 다섯 방울은 권력욕 식욕 성욕 재물욕 수면욕을 뜻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이야기다.

이것이 떠오른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편집·보도국장과 대화 내용 때문이었다. 박찬수 <한겨레> 국장은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고, 현실에서 동떨어진 그의 인식이 위태로워 보였다’고 소회를 전했지만, 사실 더 두드러진 것은 그의 타고난 생존 본능이었다. 현안에 관한 그의 오기는 애처로울 뿐이었다. 말소 대상으로 물러설 데도 없는데, 오기로라도 방어하겠다는 몸부림이었다. 그것이 박근혜 비대위원장에 이르러서는 돌연 비굴 자세로 돌변한 것이다. ‘그(박근혜)만 한 정치인이 어디 있겠나!’ 뿌리에 매달려 버둥대는 나그네 모습은 그래서 떠올랐다.

그가 직접 박 위원장을 비난한 적은 별로 없다. 행동으로 수족을 잘랐으니,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2010년 2월 충청북도 업무보고에서 그만 속내를 드러냈다. 강도론이다.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싸운다.” 금융위기를 언급하며 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겨냥한 것은 세종시 폐지에 정면으로 맞섰던 그였다. 그것도 강도 공범쯤으로 내몰았다. 게다가 “솔직히 일 잘하는 사람 밀고 싶고 지원하고 싶다”고 후계 문제까지 건드렸으니, 발끈한 건 당연했다. “집안 사람이 갑자기 마음이 변해 강도로 돌변하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대통령이 강도로 몰렸다.

불과 2년 전이다. 변한 건 없다. 오히려, 박 위원장은 그의 잔재를 일소하고 있다. 공천에서 그의 수족을 쳐내고, 당명과 정강정책도 바꿨다. 그런 그에게 이 대통령은 선거법 위반의 소지까지 인정하며 헌사를 늘어놓은 것이다. 어쩌겠는가, 사계가 화택(火宅)인데. 굳이 정등 비유에 빗댄다면, 코끼리는 임기, 나그네는 홀로 된 그이다. 독사는 비비케이, 민간인 사찰, 형제 비리,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 용산참사 등일 것이고, 쥐는 세월, 벌은 망상 혹은 꾀다. 그러면 독룡은? 여하튼 그 속에서 그는 바닥 보이는 권력의 꿀단지를 앞세워, 독룡 이빨을 피할 궁리를 한다. 궁박한 이의 말꼬리 잡아 조롱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것이 회피 수단일 수 없다는 것을 전하고 싶을 따름이다. 비굴이 어떻게 독룡을 회유할 것인가.

1971년 공화당 실세 4인방의 항명파동 때 일이다. 김성곤 등 실세 4인 등 공화당 의원 23명은 박정희의 뜻을 어기고,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남산으로 끌고 가 ‘생똥 싸도록’ 두들겨 패고, 국회의원 배지를 뗐다. 김성곤은 카이저수염을 한 올씩 반쯤이나 뜯겼고, 길재호는 지팡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됐다. 독룡이 따로 없었다. 요즘 박 위원장을 보면 그때 그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 할 일은 회피할 궁리가 아니다. 운명 앞에 서는 것이다. 그가 신봉하는 하나님도 인간에게서 구원을 바라지 말라고 했다. 구원은 신(국민)의 소관이다. 인간은 그저 참회하고 용서를 구할 뿐이다. 이후의 일은 그에게 맡겨야 한다. 죽음의 용산참사, 죽음의 정치보복, 죽음의 빈곤, 죽음의 노동 현장, 친인척 부정부패, 비비케이, 민간인 사찰, 4대강 파괴 등 정리할 일이 많다. 특히 죽임, 죽음의 문제에 대한 참회는 통절해야 한다. 그게 없이는 설사 독룡이 입을 다문다 해도, 그가 있는 곳은 어디나 화택이 될 것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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