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연대 형성,
과거 같으면 꿈도
못 꿀 파업의 진화
사회적 연대 형성,
과거 같으면 꿈도
못 꿀 파업의 진화
파업이란, 노사 협상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쟁의행위의 하나로서, 사실상 임금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상품을 판매중지하는 행위이다. 노동시장에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임금노동자에게 파업이란, 그래서 최후의 옥쇄투쟁일 수밖에 없다. 자본과 노동 간 권력관계의 비대칭성을 고려할 때, 노동자는 아무래도 모든 면에서 불리한 처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동안 수많은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노동자들의 쟁의행위는 헌법과 노동관계법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파업은 이제 보편적 인권의 국가적 실현 형식인 시민권 가운데서도 ‘기본권’으로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 헌법 33조도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 노동3권, 즉 단결권·단체교섭권과 함께 단체행동권(파업·태업 등)을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엄연히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헌법적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음에도, 이제껏 우리 사회에서 파업이 법에 의해 보호받거나, 합법파업으로 인정받은 경우를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미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내가 아는 한 우리 사회에서 파업은 곧 모조리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법의 보호는커녕, 준법투쟁에 대해서조차도 형사처벌은 물론이거니와, 명예훼손과 영업손실을 걸어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그러잖아도 보잘것없는 노동자의 호주머니를 아예 거덜을 내온 게 우리네 쟁의 풍광 아니었던가. 그뿐만인가? 심지어 ‘조폐공사 파업유도사건’처럼 대검 공안부가 직접 나서서 파업을 유도하고, 노조를 불법의 함정에 빠뜨려 결국 와해시켰다는 의혹이 일어, 특검이 구성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니, 우리 노동 현장에서는 노동3권이 기본권이라는 헌법적 보장은 한낱 허울뿐이었고, 실제로는 언제나 야만적인 노동탄압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아예 노동권을 포기하고 노예처럼 살든가, 머리띠 두른 채 사생결단의 비장한 투쟁으로 일관하든가, 선택은 언제나 둘 중 하나였다.
문제는, 이런 구도 속에서 노동자가 어떤 선택을 하건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와 동의를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눈엔 파업이 그저 ‘그들만의 밥그릇 싸움’ 정도로만 치부되었기 때문이다. 파업의 공공성은 가려지고 사익쟁투로만 부각됐다. 여기에 대다수 언론이 일방적으로 자본의 편을 들면서 파업을 교묘히 ‘시민적 불편’으로 연결시키기라도 하면, 게다가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야말로 정의와 공정성”이라는 악질적인 자유주의 프레임을 덧씌우기라도 하면, 쟁의는 그야말로 백전백패로 치닫기 일쑤였다. 그 아무리 정당한 파업일지라도 돌아오는 것은 여론의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세상이 변했는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진화했는지 몰라도, 어쨌든 이제 노동 문제는 노동만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노동이 노동만의 문제로 고립될 때 오히려 노동의 위기가 가속화되는 딜레마에 봉착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이런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조중동이 은폐하고 왜곡하던 진실 전달을 인터넷언론과 에스엔에스(SNS)가 대신하기 시작하고, <나는 꼼수다>라는 대안적 시사평론매체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대안매체의 힘이 ‘희망버스’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이를 시발로 노동 문제에 대한 사회적 연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해직기자들은 <뉴스타파>라는 대안언론을 제작하고, 파업중인 방송사 노조는 공정방송을 위한 자체 제작 프로그램을 쏟아낸다. 회사와 권력의 사익 안에 갇혀 있던 공공성이 파업을 통해 시민들에게 되돌려지고 있는 것이다. 과거 같으면 꿈도 못 꿀 파업의 진화가 아닐 수 없다. 파업이 노동만의 고립된 골방에서 광장으로 뛰쳐나와, 시민과 함께 어울리고 있다. 바야흐로 파업 2.0의 시대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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