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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주어에 상관없이 / 고건혁

등록 2012-03-28 19:37

고건혁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고건혁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이중 잣대로는
반민주적
정치 방식을
넘어서지 못해
한국어의 문장 구성에서 주어가 갖는 위상은 중요하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이 “비비케이(BBK)를 설립했다”는 발언을 하긴 했지만 ‘내가’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그가 비비케이의 설립자라고 주장하는 건 허위라던 나경원 전 의원의 주장이 새삼 그것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면, 그냥 농담. 그런데 정말로 최근 들어서 주어의 의미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게 됐다. 지난주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사퇴하기까지 벌어졌던 이런저런 얘기의 흐름을 마주하고 나서다.

문제가 된 상황을 요약하면 ‘이정희 대표의 보좌관이 여론조사를 통한 경선 과정에서 자신들의 지지자에게 문자를 돌려 혹시 전화를 받게 되면 나이를 속이고 응답할 것을 요구했다’고 할 수 있다. 혹시 이 문장에서 서술한 상황이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이라면, 주어를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정당·후보의 이름으로 바꿔보자. 예컨대 ‘새누리당 아무개 후보의 보좌관이 여론조사를 통한 경선 과정에서…’ 이렇게 하고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경우라면 더 이상 민주주의에 관해서 대화를 나눌 자신이 없다.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것을 아예 무시하는 것이니.

얘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절차적 정당성을 존중하고 여론조사 조작 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는, 그럼에도 마지막의 가치 판단을 주어가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보좌관)’냐 아니면 ‘새누리당 아무개 후보(의 보좌관)’냐에 따라 다르게 하는 이들이다. 사퇴면 사퇴, 사과면 사과, 재경선이면 재경선, 지지하든 반대하든 상관없이 동일한 잣대가 적용되어야 할 텐데, 평소 새누리당 후보들의 결함(이를테면 손수조 후보의 경우)에 대해서 사퇴를 거론하는 이들이 이정희 대표의 경선을 두고서는 관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적잖이 볼 수 있었다. 그건 분명한 이중 잣대다.

민주주의를 복원하고자 ‘반엠비’ 기치 아래 똘똘 뭉쳐야 할 긴급한 상황에서 무슨 한가한 소리냐 싶겠지만, 목표하고 있는 게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당신이 반대하는 정당·후보를 지지하는 이들과 반목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게 적대까지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적대를 넘어 근본부터 글러먹었으니 아예 말살시켜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면? 그게 바로 군사정권과 이명박 정부와 조·중·동 등이 지금까지 해왔던 반민주적 정치의 방식이다. 그걸 넘어서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늘과 땅만큼 떨어져 있는 이들끼리라도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규칙이고, 그 규칙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 자기편이 잘못하더라도 똑같이 인정하고 비판하고 제재할 수 있는 일관성이다.

이미 이정희 대표가 사퇴하여 일단락된 이후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들이 선정적인 색깔론 공세를 퍼붓고 있는 시점에서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걸 그들에게 동참하는 것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색깔론에 반대하는 것과는 별도로, 이중 잣대의 문제는 이정희 대표의 경선 문제를 넘어 선거 전반, 아니 선거 이후에 등장할 새로운 정부의 운영과 관련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많은 실정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비롯하여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강정 해군기지 등은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으되 어쨌든 참여정부 때부터 시작되어 왔던 일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만약 당신이 지지하는 정부가 집권 후에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반복한다면, 이를테면 새 정부가 공기업을 민영화한다면 어떨까? 이명박 정부의 민영화와 새 정부의 민영화는 다르다고 주장할 것인가? 아니, 당신의 정부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당신의 ‘주어’를 덮어놓고 지지하게 하는, 바로 그 절대적인 확신이다.

고건혁 붕가붕가레코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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