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사는 일이 다
실무가 돼버려
욕망 자체가
박제된 것 같다
실무가 돼버려
욕망 자체가
박제된 것 같다
영화 <건축학 개론>을 봤다. 이야기 구조가 특이했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온다. 대학 1학년 때 좋아했던 여자다. 15년 만이다. 건축가인 남자에게 집을 지어 달라고 한다. 여자는 결혼했다가 막 이혼했고, 남자는 이제 막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다. 남자가 여자의 집을 지어주는 현재의 이야기와, 둘이 대학교 1학년 때 만나는 과거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흘러간다.
첫사랑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만나는 이야기들이 더러 있는데, 이 영화가 특이한 게 뭐냐면 현재 시점에서의 남녀가 매우 쿨하다는 것이다. 욕망을 자제하는 게 아니라 욕망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멜로영화라고 광고한 것 같은데 남녀가 만나서 감정이 일지 않으면 멜로가 되나? 아닌 게 아니라, 90년대 중반 대학에서 둘이 처음 만날 때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호기심과 들뜸과 설렘으로 가득하다. 현재의 남녀와 과거의 남녀는, 배우도 다르다.
이 대조가 자아내는 효과가 묘하다. 영화를 본 한 친구는 “열정과 낭만이 가득한 대학 때와, 그런 게 다 사라진 것만 같은 현재의 대조가 서글펐다”고 했고, 한 후배는 “과거의 풋풋한 모습이 앙꼬이고, 현재의 장면은 그걸 보기 편하게 만드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감정 기복이 별로 없는 현재와 달리, 과거에선 서로의 감정이 증폭되다가 오해와 불신으로 남자가 떠난다. 그 바로 뒤에, 현재로 돌아와서 비로소 과거의 오해가 풀린다. 아무리 쿨해도 이쯤 되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터. 잠깐 망설임이 있는 듯하더니 결국 서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80년대 중반에 본 드라마 한편이 떠올랐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단막극이었다. 70년대 초반 학번 남녀의 이야기다. 남자는 의대생, 여자는 인문대생에 둘이 같이 연극반을 했는데 긴급조치가 선포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연극반은 불온서클이 됐고, 여자의 집에선 여자를 가둔 채 남자가 전화를 해도 바꿔주질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뒤, 남자는 시골에서 의사 생활을 하며 결혼해 살고 있었다. 방송사 프로듀서가 된, 아직 미혼인 여자가 취재차 시골에 갔다가 남자를 만났다.
이 드라마에선 둘 사이에 여러 가지 감정이 다시 살아난다. 과거 얘기가 오가면서 연정도 다시 조금씩 싹트고, 연극에 대한 열정도 살아난다. 여자는 남자에게 서울 와서 아동극을 해보라고 권한다. 둘이 같이 서울 가기로 한 날, 남자가 오지 않는다. 결국 <건축학 개론>이나 이 드라마 모두 첫사랑을 오랜만에 만나 과거의 오해를 풀지만, 결국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그런데 방점이 다르다. 드라마는 남자의 갈등에 방점을 찍지만, 영화는 남자의 (욕망의) 방기, 혹은 추스름에 방점을 찍는다. 드라마는 현재에 방점을 찍고 영화는 과거에 방점을 찍는다. 드라마는 현재의 이별을 애틋해하는 반면, 영화는 현재의 화해를 빌려 과거의 추억을 완성하려 한다.
그럼에도 내게 더 불쌍해 보이는 건 드라마의 의사보다 영화의 건축가이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고, 의사보다 선택의 여지가 훨씬 많은데도 그에겐 낭만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는 일이 다 실무가 돼버려 욕망 자체가 박제된 것 같다. 그가 주인공인 영화에 300만명이 몰린다. 연애, 결혼, 출산 모두 포기하고 산다는 ‘3포세대’의 미학? 가진 게 조금인데 그나마 줄어들까 두려워 낭만을 버리는 것? 하긴 내 눈엔 불쌍해 보이지만, 그 건축가 스스로는 다를지도 모른다. 불쌍한 티를 안 내니까. 특별히 갈등하거나 아파하는 모습도 안 보이니까. 그런 건가. 삼포세대가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 들키지 않는 것? 혹은 들킬 욕망 자체를 없애는 것?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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