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병찬 논설위원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대중을 현혹시킨 현란한 화술도 생명을 다했다. 엊그제 대선 1차 투표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후보에게 1위를 내줬다. 결선투표의 전망은 더 어둡다. 부자 친구들만 모아 당선파티를 열고, 이들을 위해 세금을 대폭 낮추고, 각종 규제를 풀어 그 먹잇감을 늘리고, 고소득 고배당을 허용했으며, 친구들이 운영하는 민영방송에 광고를 몰아주던 사르코지. 가치와 이상과 규범을 무시하는 행태가 오죽했으면, 초록이 동색이라 할 극우계열의 마린 르펜마저 등을 돌렸을까.
그를 두고 ‘부자들의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명박 대통령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가 낮춘 소득세 최고세율(41%)은 이 대통령이 지킨 35%보다 훨씬 높다. 재벌들한테 골목 상권까지 내주진 않았고, 토건족 돈벌이를 위해 강산을 뒤집어놓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부자 친구들은 사르코지 없는 조국을 떠나려 하는데, 이 대통령의 친구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인물만 바뀌면 성향이 비슷하더라도 죽자사자 지지하는 유권자가 있고, 투표율이 형편없이 낮으니 패거리만 잘 단속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프랑스의 투표율이 주목되는 건 이 때문이다. 1차 투표율은 무려 79.47%였다. 한국에선 15년 전 15대 대선 때나 기록했던 수치다. 2007년 대선의 경우 프랑스 1차 83.77%, 2차 83.97%였고, 한국은 63.0%였다. 보름 전 총선 투표율은 고작 54.3%에 그쳤다. 유권자의 절반 남짓만 투표하고, 유권자의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득표로 국민의 대표가 당선되는 판이니, 한국의 민주주의는 위기다. 그렇다고 유권자 탓만 할 순 없다. 선택을 힘들게 하는 제도를 먼저 문제 삼아야 한다.
솔직히 19대 총선 전 과정을 관철했던 야권연대 움직임이 썩 내켰던 건 아니다. 물론 정권 심판론이 모든 쟁점을 수렴해버린데다, 1표 차로 이기더라도 1등만 당선되는 현행 소선거구제 아래서, 여권이건 야권이건 연대·연합의 노력은 피하기 힘들다. 그러나 유권자 입장에선, 설사 정권 심판론에 동의하더라도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은 싫다. 작가 이외수씨가 정권 심판에 동의하면서도, 정견과 삶과 태도 등을 따져본 뒤 여당 후보 지지 의사를 밝혔다가 몰매를 맞은 것은 오늘의 불편한 현실을 상징한다. 마음에도 없는 정당과 후보자 선택을 강요받을 때 유권자가 선택하는 건 방관이나 포기다.
사실 이번만이 아니었다. 우리 유권자는 매번 불편했다. 다양한 지향성을 충족시킬 다양한 노선의 정당이 없었다. 있다 해도 원내 진출의 가능성이 희박했다. 이는 유권자를 사표방지 심리에 포박당하도록 했다. 노선과 정책, 진정성이 인정돼도 유권자는 사표방지 심리 때문에 거대 정당으로 손이 갔다.
프랑스의 결선투표제가 부러웠던 건 이 때문이다. 1차 투표에서 유권자는 제약을 받지 않고 선택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극우에서 극좌까지 다양한 노선과 정책의 정당들이 경쟁할 수 있었다. 게다가 1차에서의 득표는 2차 투표 때 정당 간 연립, 즉 정치적 영향력의 토대가 되는 만큼 유권자의 투표 의지를 더욱 자극했다.
민주주의는 식생이 다채로운 정원과도 같다. 시민은 생각과 뜻을 같이하는 정당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꽃피운다. 다양한 가치와 이상이 꽃필 때 민주주의의 정원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다워진다. 이제 형식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고는 하나 지금도 한 종류의 생각과 그와 비슷한 것들만을 강요하는 사회적 억압은 여전하다. 여기에 선거제도는 다양성의 싹을 잘라 버린다.
분단 상황에서 사회적 억압은 일조일석에 극복하기 힘들다. 그러나 선거제도는 정치권 의지에 따라 최소한 결선투표제는 도입할 수 있다. 1당이나 2당에 유리하지도 혹은 불리하지도 않다. 오히려 지금처럼 전체 유권자의 30% 남짓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돼 1~2년만 지나도 국정의 안정성이 흔들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연립과 공동정권을 유도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독선과 독주를 견제할 수 있다. 감옥 앞에 줄지어 선 권력자들은 전제 정권의 필연적인 부산물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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