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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훈민정음과 도둑질 / 노형석

등록 2012-05-13 19:17

“해가 서쪽에서 뜰 글자다!”

얼마 전 끝난 사극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의 반대파 밀본의 정기준은 훈민정음 반포를 두려워하며 이런 말을 던진다. 당대 불온한 혁명이었을 ‘훈민정음’은 한 이름이 아니다. 1443년 12월 창제한 새 글자 이름이자, 1446년 9월 반포된 해설서 제목이기도 하다.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한글이 널리 알려진 건 이 해례본 반포 뒤부터다. <조선왕조실록>엔 해례본이 안 나온다. 1443년 창제 이듬해 2월 집현전 학자들에게 언문으로 고서를 번역하게 하고, 반대파 최만리가 상소해 아전들에게 한글 가르치는 것을 지적한 내용 등으로 미뤄 창제 뒤 3년간 세종은 갈등과 고뇌 속에 보급용 해례본을 준비했음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33장짜리 목판본인 <해례본>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쌓아올린 우주다. 내용 중 알짬은 이른바 ‘5해1례’다. 정인지, 최항 등 학사들이 글자체 28개의 조성원리와 용례들을 일러준다. 고래 중국 철학·음운학 연구에 바탕해 열정으로 찾아낸 우리의 닿소리(자음) 17개와 홀소리(모음) 11개가 빚어내는 철학적, 미학적 이상이 있다. 음양오행에 맞춰 혀, 입, 목구멍 등을 본뜬 ‘ㄱ, ㄴ, ㅁ, ㅅ, ㅇ’의 기본 5자음, ‘천(·)지(ㅡ)인(ㅣ)’을 본뜬 단순명쾌한 모음자들이 사각 틀 안에서 위아래, 옆으로 맞물리는 우주적 디자인. 일본 학자 노마 히데키가 “지(知)와 감성의 모든 세부를 지탱하는 일”이라고 한 대로다.

560여년 된 이 천하보물이 도둑질 시비에 휩싸였다. 4년 전 경북 상주에서 발견된 판본을 놓고 서로 주인이라며 소송을 다툰 끝에 패소한 골동상은 도둑으로 몰려 수감되자 판본을 숨긴 채 입을 닫아버렸다. 승소한 다른 골동상은 실물도 없는데 문화재청과 국가로 소유권을 넘기는 이벤트를 벌였다. 그 또한 절에서 다른 도둑이 훔친 해례본을 넘겨받았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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