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명색이 인권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으로서 일상에서 그에 걸맞은 실천을 하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매번 위선과 허위로 가리려 애쓰지만, 어쩌랴! 생활을 전면적으로 함께하는 가족에게만큼은 그 알량한 기만이 통할 리 없다. 아내는 평소 “내 말 한마디면 당신의 정치생명은 끝장”이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한다. 고백하건대 나의 권위주의는 박정희를 능가하고, 그 가부장성은 마초에 버금간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들만큼은 아직 그 위선의 실체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아직 어려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다 알면서도 능청스레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물론 후자의 경우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어쨌건 아들과 대화의 밀도가 높아지던 어느 즈음부터 나는 어떤 문제든 가족회의를 통해 제기하고, 존중과 이해, 설득으로 해결을 도모하자고 제법 호기롭게 제안했다. 아마도 그때 나의 침방울은 장광설만큼이나 사정없이 아들의 면전으로 튀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와 같이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적절히 눈을 마주쳐줌으로써 아비의 체면과 권위를 온전히 세워주었다. 어쨌거나 인권을 주창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제 아이에게 매를 들거나 손찌검하는 일 한 번 없이 민주적(!)으로 가족관계를 유지해왔다고 이제껏 우쭐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은 폭탄선언을 했다. 그 언어를 지금 온전히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략 “가족회의가 민주주의를 빙자한 기만에 불과하고, 결국은 부모의 의사를 아들에게 관철시키는 무형의 강압과 지배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었고, “앞으로 가족회의가 진정으로 민주적으로 운영되게 하려면 의사결정을 할 때 내 표에 가중치를 달라”는 주장이었다. 이유는 “부모는 합쳐서 두 표인 데 반해, 나는 한 표밖에 안 되므로 언제나 부모의 뜻대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 이럴 바에야 가족회의는 하나마나 빤한 결론을 내기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민주주의는 개뿔이나!”라는 것이었다.
사실 여느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아들에게도 신형 스마트폰은 유혹적이었을 테고, 염색이나 파마, 또는 (그 볼썽사나운!) 스키니진도, 컴퓨터게임도 절실한 현안이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번번이 부모와 의견충돌이 빚어졌다. 가족회의에 상정된 이런 안건은 다수결로 처리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2 대 1의 표결 결과는 변함이 없었다. 민주주의의 권위를 빌려 부모의 의사는 그야말로 세련되게, 그리고 완벽하게 관철되었다. 그러나 아이의 벼락같은 문제제기 앞에 변명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요구대로 가중치 한 표를 더 주는 것으로 재빨리 사태를 수습했다. 그 와중에도 얄팍한 셈법이 작동했다. 2 대 2로도 버틸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마저 수용하지 않으면 판이 깨지고, 결국 더 엄중한 사태가 닥칠 것이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다수결의 원리로 이해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맞는 말도 아니다. 자고이래로 독재정권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다수의 지지를 빌려 종종 정당화되었다. 나는 진정한 민주주의란, 절차의 공정성 못지않게 소수자, 약자 존중의 원칙이 지켜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고 믿는다. 인권존중 없는 민주주의는 가짜이기 때문이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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