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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80년 5월, 기억과 망각 / 김용철

등록 2012-05-15 19:27

김용철 종합편집팀 기자
김용철 종합편집팀 기자
80년 5·18 때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떠오르는 몇가지 기억이 있다. 갑자기 임시휴교령이 내려졌다. 거리에선 총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헬기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삐라가 뿌려졌다. 한집에서 자취하던 고등학교 2학년 형은 석유를 사러 나갔다가 연락이 끊겼다. 누나는 친구의 싸늘한 죽음을 들려줬다. 내게 5·18은 조각난 기억들뿐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건 5·18 32돌을 앞두고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다. 신문을 살피던 중 눈에 띈 광주에서의 한 회견 때문이었다. “5·18이 한 세대가 지나고 제도화·의례화되면서 그때의 숭고한 정신이 희미해져 가고 있다.” 8일 광주시와 시의회, 5·18기념재단 등이 회견을 열어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를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망각’이란 단어가 스쳤다. 희미한 기억으로 잊혀질지 모른다는, 아니 어쩌면 이미 잊혀졌을지도 모르는 망각의 두려움.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은 “현재의 필요가 기억을 선별한다”고 말했다. 5·18의 현재적 필요는 무엇일까.

망월묘역을 배경으로 사진작업을 해 온 노순택씨의 전시회를 찾아간 건 그래서였다. ‘망각기계’란 주제가 주는 끌림이 있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묘역의 영정사진들. 얼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운주사의 불탑들. 둘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망각이 빠르게 우리의 기억을 침식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작가는 이렇게 썼다. “망각의 성립은 언제나 공조에서 비롯된다. ‘그날’에 대한 망각은 결국 반복되는 폭력을 승인하겠다는 게으른 의지의 표명 외에 또 무엇일까.” 5·18을 망각하기엔 너무 때이르다는 무언의 시위처럼 보였다.

우리 현실이 어때서, 이만하면 살 만하지 않으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민주주의가 이만큼 성숙했으니 이제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가야 한다고 충고를 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런가. 국가에 의한 폭력은 더이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갈등은 국가폭력이 마침표가 아닌 현재진행형임을, 민간인 불법사찰은 민주주의와 인권이 언제든 억압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하면 쇠고기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정부가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현실은 망각해선 안 될 것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비단 국가폭력뿐인가. 매일 신문 1면을 채우고 있는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 당권파가 과거 독재와 싸우면서 지키려고 했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 폭력으로 얼룩진 오늘의 모습을 상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발언과 행동에선 투쟁의 기억만 간직한 채 파벌의 논리에 갇혀 민주적 절차와 도덕성은 부차적인 가치쯤으로 치부하는 일그러진 진보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들이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초심인데도 말이다.

옛 서독 대통령 바이츠제커가 2차 세계대전 패전 40돌 기념식에서 한 연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게 왜 중요한지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극복이 아니다. 과거에 눈을 감은 사람은 현재도 보지 못한다.”

김용철 종합편집팀 기자 yckim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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