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너도나도 민생, 그야말로 민생 전성시대다. 여야를 막론하고 시대의 화두가 된 듯하다. 보통사람의 삶이 엄청나게 힘들어졌다. 이념이나 이론이 아무리 고상해도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 무용지물이다. 그러니 민생 운운은 당연하다 싶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민생을 누가 어떻게 담보할 것인가?
서민의 삶, 즉 민생의 적은 시장이다. 시장은 독하다. 피도 눈물도 없다. 반면 개인은 무력하기만 하다. 고단한 삶의 신산을 이 광포한 시장과 나약한 개인에게만 맡겨놓으면 사회는 강퍅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국가가 나서서 이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민생을 풀어줘야 한다. 이것이 정치적 평등의 기제로 시장의 승자독식, 강자폭식을 해소하는 민주주의 본래의 역동성 아니던가.
신자유주의는 불평등 민주주의(unequal democracy)를 낳았다. 신자유주의가 가장 강고한 미국과 영국에서 불평등이 가장 심하다. 신자유주의 등장 이전, 이들 나라는 평등까진 아니지만 그런대로 살 만한 ‘더불어 사는’ 나라였다. 성장 속에 분배가 잘 이뤄졌다. 그런 사회를 정글로 바꿔놓은 것은 정치의 힘이었다.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시장보수 세력이 권력을 잡고, 더불어 사는 시스템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그 핵심은 노조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의 대표가 대처고 레이건이다. 대처는 탄광노조를, 레이건은 항공관제사노조를 타깃으로 삼아 노조의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나 부자는 구조적 우위에 선다. 이들을 견제할 수 있는 일선 조직은 사실상 노동조합뿐이다. 노조의 견제력(countervailing power)이 있어야 기업과 시장이 사회적 책임을 의식한다. 노조가 성가신 존재를 넘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기업으로선 노조의 견제력을 약화시키려는 본성을 갖기 마련이다.
미국에서 그나마 복지국가에 근접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1930년대에 구축된 뉴딜체제다. 어떤 정책이든 그 정책을 지지하는 집단이나 세력이 있어야 한다. 뉴딜체제도 그 정책을 지지하는 연합, 즉 노동자·농민·소수인종 등으로 구성된 뉴딜연합이 있었기에 30여년 동안 지탱될 수 있었다. 이 뉴딜연합이 유지될 수 있었던 기축요인은 뭐니 뭐니 해도 노동조합의 육성·강화다. 노조에 우호적인 법(NIRA)을 대법원이 위헌으로 판정하자 진보세력은 와그너법(NLRA)을 만들어 아예 정부가 노조 결성에 발 벗고 나서도록 했다. 이게 뉴딜체제가 사회적 약자의 민생을 안정화시키는 시스템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우리의 노조 조직률은 고작 9.8%다. 이에 대한 대책이 없다면 민생이란 것도 작은 시혜나 일시적 배려의 보수 프레임에 갇히고 만다. 날치기조차 민생을 앞세워 합리화하는 게 저들이다. 당장 박근혜 의원이 민생 대 정쟁의 대립 프레임을 통해 정치를 위축시키고 있는 것도 좋은 실례다. 민생담론이 진보적 의미를 가지려면 노동 등 민생의 당사자가 정치적 힘을 가지고 시장에 맞서 스스로의 이해와 요구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즉 민생의 관건은 민주당 등을 비롯한 범진보세력이 사회적 역관계의 조정을 이뤄내는 것이다. 그래야 유럽의 복지국가처럼 정권이 바뀌어도, 경제상황이 악화되더라도 서민의 민생이 지켜진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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