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주변에서 <추적자>라는 드라마가 재미있다는 말들을 많이 해 일주일 전쯤 몰아서 봤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재벌 그룹 회장 사택 집무실 벽에 전화기가 하나 붙어 있다. 수화기를 들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상대방이 받았다. 일종의 핫라인인 모양이다. 박근형이 연기한 이 회장이 야밤중에 수화기를 들고 말한다. “어이, 김 총장! 내일 아침에 긴급체포하기로 한 거, 그거 다시 한번 검토해줘. 그래. 고맙다.” 긴급체포의 대상은 이 회장의 사위다. 원수지간인 회장과 사위 사이에 모종의 딜이 오간 끝에 회장이 이 전화를 한다. 그 뒤 사위에 대한 수사는 중단된다.
그럼 김 총장이 누군가? 여당 사무총장일 리는 없고, 결국 검찰총장일 거다. 검찰총장을 이렇게 하인 부리듯 한다? 이 재벌 회장의 힘이 무소불위라는 얘기일 거다. 그걸 이처럼 간명하게 말하는 모습이 박력 있어서 좋지만, 실제로 그런가? 대한민국 검찰총장과 재벌 회장 사이에 이런 핫라인이 있다? 그러고 보니 영화 <돈의 맛>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핫라인’까지는 아니지만 재벌 회장이 ‘총장’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청탁을 하고, 그 청탁은 성사된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검찰총장이 이런 뒷거래에 마구 휘둘리는 것으로 비치니, 예전 같으면 “검찰 집단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검찰이 직접 수사하거나 법원에 소송을 냈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이런 건 좋은, 아니 당연한 변화다. 어디까지나 허구인 창작물을 가지고 명예훼손이라고 하기도 힘들 거다. 픽션인 한, 사실 여부를 책임질 필요가 없다. 이야기의 큰 맥락, 콘텍스트 안에서 그 상상력이 받아들여지면 되는 거다. 그럼 받아들여지느냐고? <추적자>는 연일 매스컴의 격찬이 쏟아지는 가운데 시청률이 두 자리로 올라섰다. 어떤 기사는 드라마의 장점 중 하나로 이야기의 ‘현실성’을 꼽기도 했다.
드라마를 평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 아니지만, 나도 재밌게 봤다. 여당 대통령 후보(회장 사위)가 “내 꿈은 청와대가 아냐. 거긴 정거장이야. 임기 말만 되면 언론이건 검찰이건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그 자리가 아니라, 평생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 저 자리(장인, 즉 재벌 회장 자리)”라고 말하는 걸, 지상파 방송 드라마에서 듣는 것만으로 충분히 흥미로웠다. 어느새, 최소한 이야기적 상상력 안에서는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가 바뀌고 있구나! 이야기 속에서 최고 권력자가 바뀐다는 건, 최고 악당이 바뀐다는 말일 텐데.
하지만 사법 시스템에 대한 음모론적 묘사가 거칠어 보였다. 주인공과 적이 정면으로 대립하는 극적인 구조를 만들어가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 모르지만, 약한 자가 가진 자에게 농락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드라마의 발언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주변에 그런 말을 했더니, 역으로 나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많았다. 두 가지였다. “실제로 검찰이 그렇지 않냐?”와 “재밌으면 되는 것 아니냐?”였다.
나도 실제로 검찰이 어떤지 모른다. 또 영화나 드라마가 재미 외에 어떤 소명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선악을 명확히 갈라놓는 극적인 상상력 못지않게, 사회 시스템과 거기에 얽매인 인간들에게 다가가는 정교한 상상력도 큰 재미를 주지 않는가. 검찰이 아무리 욕을 먹고 있어도 탐구를 포기하면 안 될, 시스템의 핵심적인 부분일 텐데. 며칠 전 내곡동 대통령 사저와 총리실 민간인 불법사찰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 발표가 있었다. 그걸 보고 생각했다. 진짜 비극은, 드라마에 나오는 유의 직접적, 범죄적 뒷거래가 없이도 검찰이, 사회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 아닐까.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화보] 드라마 ‘추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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