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
‘설계도가 낡았다.’ 류우익 통일부 장관이 지난 6월23일 경북 문경 영남요에서 통일항아리 6점을 공개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류 장관 취임 뒤 강조되고 있는 통일항아리 사업은 정부가 앞으로 20년간 55조원의 통일기금을 모으겠다는 것이다. 2030년 통일이 될 경우에 대비해 필요한 통일비용의 일부를 마련하겠다는 의미다. 국회의 반대로 법제화가 안 돼 모금활동을 못하고 있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류 장관은 지난 5월 자신들의 월급을 기부하는 등 이 사업에 열성을 보이고 있다.
이 사업이 낡게 느껴지는 것은 통일항아리가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사업인 탓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 ‘민족 개념에만 바탕을 둔 통일론이 현시점에서 얼마나 유용성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통일항아리 사업은 ‘2030년 통일’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초등학생부터 보수와 진보 논객까지 통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는데, 유독 정부만 낡은 통일론을 고수하고 있는 형국이다.
일례로 보수논객인 지만원씨가 지난 4월29일 자신의 사이트 ‘지만원의 시스템 클럽’에 올린 통일항아리 비판 글을 보자. 지씨는 ‘협박당하고 있는 처지에서 통일하겠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통일항아리에 대한 비판 논거 중 하나로 “통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는 점을 들었다. 지씨는 더 나아가 “통일이 우선인가, 삶의 질이 우선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말하자면 민족 통일이라는 개념보다 상위 개념이 남북한 각각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것이다. 많은 초중고 학생들이 “북한과 통일하면 생활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에 통일이 싫다”고 얘기하는 것을 좀 세련된 말로 설명한 것이다.
‘민족 개념을 넘는 통일가치 발견’은 진보진영에도 심각한 화두다. 진보진영의 대표적 통일정책 전문가인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도 최근 “현대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하면서 민족문제를 고루하게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한겨레> 6월13일치) 진보진영에서는 평화나 환경 개념을 통해 통일에 새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이렇게 ‘민족을 넘는 가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은 그만큼 남북의 이질화가 심화돼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민족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이질적 요소는 해소돼야 할 걸림돌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민족 개념이 남북을 잇는 기능은 앞으로 더욱 약해질 가능성이 높다. 고령인 1세대 이산가족들이 모두 삶을 마치게 되는 미래의 어떤 시점을 상상해보라. 그러므로 통일 논의가 생명력을 얻으려면 민족 개념을 보완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가치들을 개발해야 한다. 그것은 ‘공동번영’이라는 경제적 요소일 수도 있고, ‘전쟁 없는 한반도’라는 평화 담론일 수도 있다.
이제 대선까지 6개월이 채 안 남았다. 이 시점에서 통일부가 해야 할 일은 통일항아리 같은 알맹이 없는 정책이 아니다. 통일부가 좀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통일정책을 내놓을 수 없다면, 차라리 변화한 환경에 맞게 통일 논의를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준비작업을 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통일부가 통일에 대한 변화된 인식이나 의견들을 널리 모으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통일부가 이런 기초작업을 한다면, 다음 정부로서는 현실적이고 가치있는 통일론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다음 정부는 이명박 정부처럼 현실성 있는 통일정책도 못 내놓는 정부라는 비판은 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김보근 한겨레평화연구소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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