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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아는 사이’의 폭력 / 이라영

등록 2012-06-27 19:29

이라영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과정
이라영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과정
여자 연예인들 중에 남편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를 당한 모습을 공개하는 일이 간혹 있었다. 그렇게 유명인이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며 가정폭력의 실상을 공개하면 잠시 반짝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다. 그러나 몇 주 지나면 다시 잊힌다. 날마다 사건·사고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일상이니 물론 일일이 기억하며 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제대로 고치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차츰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마저도 제대로 안 되니 답답한 노릇이다. 경찰의 안이한 대응으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수원 20대 여성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석달도 되지 않아 폭행 피해 여성의 신고 전화를 경찰이 또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이 발생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일단 피해자의 신고를 받은 뒤 발신지로 확인 전화를 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가해자가 전화를 받을 확률이 높은 피해 현장에 경찰이 전화를 걸어 “여자분이 맞고 있다고 신고해 확인차 연락했다”고 묻는 절차가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 그렇다면 감금이나 폭행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고를 하는 게 정말 안전한 일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더구나 여성의 피해신고였음에도 엉뚱하게 남성의 말만 믿고 현장에 출동하지 않은 경찰의 모습을 보며 4월의 20대 여성 살인사건과 겹치는 문제를 발견한다.

당시 경찰은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피해자의 비명과 함께 남자 목소리도 들리자 “부부싸움 같은데”라고 하거나 “아는 사람인 거 같은데”라는 반응을 보였다. 즉 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사소하게 여긴다는 얘기다. 그러나 바로 이번 사건처럼 너무도 잘 아는 동거인에게 심각하게 구타를 당하는 일도 있다. 더구나 제3자의 개입이 어려운 ‘집 안’이라는 공간과 ‘부부’ 혹은 ‘연인’이라는 밀접한 관계 속에서 폭력은 더 마음 놓고 벌어질 위험이 있으며 나아가 은폐도 쉽다. 이렇게 일상에서 가장 친밀한 사람에 의해 벌어지는 폭력이야말로 얼마나 큰 공포인가.

‘한국여성의전화’에 의하면 ‘단지 언론 보도’에 근거한 자료만으로도 2010년 한해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한 여성이 74명이다. 닷새에 한명꼴로 희생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외부에 노출되기를 꺼리는 가정폭력의 특성을 고려하면 실제 피해 현황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심각할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아내에게 살해당하는 남성의 경우 대부분 평소에 아내를 구타해왔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즉, 남성의 폭력을 오랜 세월 견디던 여성이 법조차 자신의 피해 상황을 들어줄 것이란 기대를 상실한 채 그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해 스스로 남편을 살해하는 경우다.

이렇게 ‘아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심각성에 대한 우리의 불감증을 우선 인식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살인마’의 이름을 팔고 특정 경찰을 열심히 징계해도 반복 또 반복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우리의 관용적 표현은 더욱 문제를 안에서 탱탱 곪게 만든다. 또한 피해 여성에게서 원인을 찾으려는 사회의 관념도 역시 문제다. “여자가 뭘 잘못했겠지”, “여자가 폭력을 유발한다”는 태도를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여성들을 ‘성폭력 당하지 않게’, ‘맞을 짓 하지 않게’ 억누르는 사회 분위기에서 피해 여성들은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문제를 밖으로 표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아직도 “여자와 북어는 사흘에 한번씩 패야 한다”는 끔찍한 말을 뱉으며 낄낄거리는 사회를 반성하고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라영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과정

※이라영씨가 선대인씨(선대인경제전략연구소 소장)의 뒤를 이어 필자로 참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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