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혁 경제부 기자
포털사이트 ‘파란’(www.paran.com)이 이달 말 문을 닫는다. 메일과 블로그 등 서비스는 경쟁 사이트였던 ‘다음’으로 이사가 한창이다. 파란이 어떤 사이트인가? 거대 통신기업 케이티(KT)가 피시(PC)통신의 원조 하이텔과 전화번호 검색으로 유명했던 한미르를 통합해 2004년에 야심차게 선보인 포털이다. 당시엔 최초의 기가바이트(GB) 메일 서비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50~500건 무료 제공, 스포츠신문 연재만화 독점 게재 등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물량공세에도 불구하고 1%에 못 미치는 시장점유율에 고전하던 파란은 결국 지난달에 폐쇄를 선언했다. 케이티로서는 하릴없는 굴욕이었다.
그즈음 케이티와 에스케이텔레콤(SKT) 등 통신사들은 카카오의 모바일인터넷전화(mVoIP) ‘보이스톡’이라는 골칫거리 때문에 속을 썩이고 있었다. 매출액 기준 100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카카오에 끌려다니며 자존심을 구기고 있던 당시, 한 이동통신사 관계자는 “이 모든 게 (스티브) 잡스 형님 때문”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웬 잡스 형님?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통신기술(ICT) 생태계는 흔히 시(C·콘텐츠), 피(P·플랫폼), 엔(N·네트워크), 티(T·터미널)라는 네 영역으로 나뉜다고 한다. 각각 내용물, 장터, 길, 단말기를 뜻한다. 음악과 영화 등 사람들이 찾는 다양한 서비스가 콘텐츠, 서비스를 찾기 위해 이용자들이 모이는 포털 등 장터가 플랫폼이다. 장터를 돌아다니며 콘텐츠를 고를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인 통신망과 스마트폰 등 기기가 각각 네트워크와 터미널이다.
아이폰이 들어오기 전 무선인터넷 세상에서는 엔(네트워크)이 대장 노릇을 했다. 길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이용자들이 어떤 장터(플랫폼)에서 어떤 물건(콘텐츠)을 살지가 결정됐다. 단말기도 통신사 입맛에 맞게 세팅된 뒤에야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다. 벤처기업 사장들이 굽실거리며 통신사 실무자들을 접대하고, 단말기 제조사 오너가 이통사 회장님 의중을 살피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불과 2~3년 사이 모든 게 바뀌었다. 잡스는 아이폰을 내놓으며 앱스토어라고 하는 ‘개방형 장터’를 만들고, 각자가 판매한 만큼 수익금 대부분을 챙겨갈 수 있다며 세상 모든 장사꾼(앱 개발자)들을 불러모았다. 콘텐츠 업자들을 상대로 위세를 부리며 이익금 대부분을 챙겨가던 이통사들과는 딴판이었다. 장사꾼들이 몰려들자 물건(콘텐츠)이 넘쳐났고, 자연스레 손님(이용자)이 들끓었다.
이통사 비위 맞추기에 바쁘던 단말기 쪽은 어떤가. 삼성전자는 갤럭시 시리즈를 히트시키며 글로벌 메이커로 자리를 잡았다. 엔의 주도권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고, 갑을의 관계는 역전됐다.
엔이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됐을까. 엔도 나름 해볼 것은 다 해봤다. 하지만 ‘파란의 굴욕’에서 보듯이 플랫폼·콘텐츠는 적성에 맞지 않았고, 능력도 안 됐다. 해외시장도 노려봤지만 손에 쥔 건 부끄러운 성적표뿐이다. 그리고 지금은 카카오와 ‘오래된 밥그릇’(음성통화 시장) 다툼이 한창이다. 싸움이라도 잘돼가나? 그것도 아니다. 여론을 등지고 있기 때문이다. ‘잡스 타령’이 어색할 게 없는 현실이다.
잘나가던 시절 주변을 돌보지 않았던 과거 때문이건, 급변하는 인터넷 세상에서 엔의 운명이건, 그들의 좋은 시절이 다 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망이라는 물리적 기반이 사라질 수는 없기에 네트워크라는 업종과 기업은 남을 것이다. 하지만 더이상 업계의 주도자도, ‘갑’도 아니다. 변화가 좀더 진행된 미래에 이 나라의 엔인 통신사들은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해 있을지 궁금해진다.
이순혁 경제부 기자 hyuk@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3년 전엔 하루 5억 걷었는데, 지금은 1억도 안돼요”
■ 넥타이 잡힌 이상득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통제 못 하나”
■ “저는 엄마가 아니라 미친년이었어요”
■ 삼성, 애플과의 소송에서 이긴 이유가 ‘가관’
■ [화보] 검찰 소환 이상득, 계란 세례…
■ “3년 전엔 하루 5억 걷었는데, 지금은 1억도 안돼요”
■ 넥타이 잡힌 이상득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통제 못 하나”
■ “저는 엄마가 아니라 미친년이었어요”
■ 삼성, 애플과의 소송에서 이긴 이유가 ‘가관’
■ [화보] 검찰 소환 이상득, 계란 세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