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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마트형 보수’의 탄생 / 박권일

등록 2012-07-16 19:15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이른바 ‘불만의 겨울’이라 불리는 노동당 사회협약의 파탄과 대규모 파업은 결국 보수당 마거릿 대처 총리의 집권으로 이어졌다. 대처 총리의 완력과 패기는 무시무시했다.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는 슬로건은, 영국은 물론 세계 정치담론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고 단번에 질서를 바로잡아줄 카리스마적 정치인에 대한 갈망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강렬한 법이다. 대처 총리는 전후에 등장한 어떤 보수정치인보다 강단 있는 인물로 비쳤고, 그 모습에 대중은 속 시원한 통쾌함을 느꼈을 법하다. 포클랜드 전쟁의 승리로 애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며 대처의 인기는 더욱 치솟았다. 그리하여 노동당은 무려 18년의 고단한 야당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보수당 집권을 끝낸 건 노동당의 리더이자 엄청난 달변의 젊은 정치인 토니 블레어였다. 그는 사회가 변했기 때문에 사민주의 및 신자유주의와 공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주창한 ‘제3의 길’이 블레어 정부의 정치적 대안이자 상징어가 됐다. ‘제3의 길’은 어떤 변화를 불러왔을까. 먼저 노동당의 사회주의 조항이 전격 폐기됐다. 반면 대처 정부 시기 민영화됐던 산업들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하고 투자심리를 위축시키지 않기 위해’ 보수당 시절의 각종 반노동·반노조 법안들 역시 대부분 존속됐다. 그러면서도 블레어는 틈만 나면 단호한 어조로 “차별과 빈곤과 불평등을 사회로부터 몰아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3의 길’은 처음 들으면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미덕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체는, 우파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떠받드는 전형적인 공급 위주 정책이다. 대처가 우파 정책을 우파적 제스처로 밀어붙였다면, 블레어는 우파 정책을 좌파적 제스처로 포장했던 셈이다.

정작 흥미로운 건 2012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대선을 앞둔 집권 우파세력의 모습이다. 요즘 이들의 모습이 어찌된 일인지 보수당의 대처가 아니라 노동당의 블레어와 훨씬 닮아 있다.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쏟아내는 말들을 보고 있자면 대체 이들이 ‘정통 보수’가 맞는지 눈을 의심할 지경이다. 지난 총선에서는 복지를 전면에 내세우더니, 이제는 무려 경제민주화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아연해진 민주당과 진보세력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난데없는 ‘진품명품’ 소동이 벌어졌다. “자연산 경제민주화”와 “성형 경제민주화”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한마디로 새누리당이 말하는 경제민주화는 제대로 된 경제민주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출자총액 제한제도와 금산분리 같은 사안에서 보인 모습을 보면 과연 민주당이 그렇게 큰소리칠 만한 입장인지는 의문이지만 말 자체만 보면 터무니없는 딴죽걸기라 볼 수는 없다. 그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이어져 온 이 정치세력과 박근혜씨 개인의 입법 활동이나 정책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재벌개혁 의지를 찾아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박근혜-새누리당은 왜 ‘복지’니 ‘경제민주화’니 하는, 어울리지도 않는 구호를 자꾸 가져다 쓰는 걸까? 이들이 ‘마트형 보수’이기 때문이다. 장사 된다 싶으면 상권이나 업종에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끌어와 할인가격에 처분한다는 의미에서다. ‘제3의 길’이 그랬다. 그것은 일관된 정치철학이나 통치전략이라기보다 좀 세련된 형태의 시대영합이었고 정치의 상품화였다. 종합선물세트 같은 새누리당의 정책도 본질은 비슷하다. 잘 팔리기만 한다면 정책의 비일관성이나 철학의 부재 따위가 무슨 문제냐는 식이다. 신자유주의의 전성기가 영국산 진보의 ‘변신’을 불러왔다면, 신자유주의의 황혼기가 한국산 보수의 ‘마트화’를 불러온 것이다.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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