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사회2부 수도권팀장
2만원으로 떠나는 내 생애 최고의 여름휴가
2009년 가을, 20일 남짓 혼자 제주에 머문 적이 있다. 당시 40대 중반에 접어들자 지구온난화에 녹아내리는 빙산더미처럼 몸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렸다. 애면글면 아등바등 살아온 삶도 돌아보고 싶었다. 회사 사정도 어찌어찌해서 한달 휴직이 가능해졌다.
훌쩍 제주로 갔다. 제주 성산읍 시흥에서 한림읍 한림항까지 300㎞가량 올레를 걸었다. 온종일 놀멍(놀다가) 쉬멍(쉬다가) 걸으멍(걷다가) 했다.
아침·점심은 길을 걷다 김밥 등으로 때웠다. 저녁은 숙소인 찜질방 근처 식당에서 해결했다. 면도를 하지 않아 수염이 덥수룩한 몰골로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 주인이 묻곤 했다. “도민이우까(제주도민입니까)?” 꼬질꼬질한 행색으로 봐서 관광객은 아닌 것 같은데, 말투가 제주 사람 같지도 않아서였을 터이다.
20여일 올레를 걷다 보니 “도민이우까”는 비교적 예의를 갖춘 질문이란 것을 알게 됐다. 모슬포 마늘밭 등에서 일하던 할머니들은 나를 “육지것”이라고 불렀다. 사람에게 것이라니! ‘것’은 이것저것같이 사물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가 아닌가. ‘육지것’은 제주 사람들이 외지인을 자신들과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말이다.
‘왜 내가 육지것일까’란 궁금증은 올레 10코스(화순~모슬포), 올레 11코스(모슬포~무릉)를 걸으며 어느 정도 풀렸다. 특히 올레 11코스는 ‘이 길을 걷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다크 올레’(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근대사, 현대사가 녹아 있는 길이다.
이 길에는 2차대전 때 일본이 만든 송악산 어뢰정 기지,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 대공포 기지 등을 볼 수 있다. 알뜨르 비행장은 중국 난징·상하이를 폭격하는 항공기 발진기지였다.
일제는 2차대전 말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에 대비해 제주도에 6만5000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제주 전역을 요새화했다. 요새화는 제주 사람들의 피와 눈물로 이뤄졌다. 해방 후 ‘육지부 정권’(이승만 정권) 때는 4·3사건으로 당시 제주 사람의 10%가 숨졌다. 올레 11코스에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 민간인 학살터와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운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주검을 한데 거둬 모신 ‘백조일손’ 묘역이 있다.
식민과 분단을 거치면서 제주 사람들의 육지에 대한 불신과 피해의식은 한층 굳어졌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제주해군기지를 건설하면서 제주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일방통행식 제주해군기지 추진이, 제주 사람들 눈에는 ‘육지부 정권’의 찍어누르기로 비쳤을 것이다.
4·11 총선이 끝나자 제주해군기지 기사들이 신기루처럼 언론에서 사라졌다. ‘이제 구럼비가 폭파됐으니 다 끝난 것 아니냐’는 이명박 정부의 지레짐작과 육지 사람들의 무관심에 맞서, 강정마을의 평화를 염원하는 1만명이 제주를 걷는다. 7월30일부터 8월4일까지 5박6일간 강정마을을 출발해 제주도를 동서로 한바퀴 도는 ‘강정평화대행진’ 행사가 열린다. 참가비 2만원만 내면 하루 세끼, 간식, 잠자리, 티셔츠까지 주는 ‘초특가 패키지’다.(항공권이나 배편은 제외)
평화대행진은 풍광 좋은 기존 올레코스들과 대부분 겹치는 ‘평화올레’다. 이름난 생태문화 전문가들이 길잡이로 동행해 제주의 역사문화, 환경생태를 안내한다. 열정적인 뮤지션들이 밤마다 감동과 열광의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행사를 준비하는 쪽은 ‘2만원으로 떠나는 생애 최고의 여름휴가’라고 자랑한다.
아직 이렇다 할 여름휴가 계획이 없다면, 강정을 위해 함께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권혁철 사회2부 수도권팀장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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