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과정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예비후보의 슬로건 “사람이 먼저다”가 무척 익숙하게 들렸다. 어디서 들었더라, 생각해보니 얼마 전 프랑스 대선에서 좌파전선의 후보 장뤼크 멜랑숑의 공약집 제목이 바로 ‘인간이 먼저’(L’humain d’abord)였다. 이미 19세기 말에 “기업도 하나의 인격체로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의 보호를 받는다”고 판결했던 미국의 선진적(?) 사례를 계속 본받는 중인지 세상은 갈수록 기업이 노동자보다 인격적 대우를 받고 있다. 이처럼 인격체로서의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점점 극심해지며 기업 살리느라 사람 죽이는 오늘날 우리 현실을 생각하면 적당한 슬로건이다.
그럼에도 같은 문장의 껍질을 벗겨보면 알맹이는 현격히 다르다. 프랑스 사회당보다 훨씬 더 왼쪽에 있는 좌파전선은 세계화와 미국 중심의 경제체제에 맞서 ‘인민을 중심으로’ 새로이 판을 짜려는 생각이었다. 또한 2009년 말부터 발효된 리스본 조약이 환경과 사회 정의를 해치면서까지 자유무역을 추구하는 데 일조한다는 이유로 유럽이 이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문재인 후보 쪽은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복지국가 건설을 더욱 난망하게 만들 우리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재협상의 의지를 선명히 보이지 않고 있다.
이렇게 노동자·서민을 위태롭게 만드는 체제에 침묵하면서 외치는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은 결국 이미 관람한 “사람 사는 세상”의 속편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그 ‘사람 사는 세상’이 오늘날까지 22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낸 쌍용차 중국 매각을 통해 ‘사람 잡는 세상’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물론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그러니 단 한 번도 참여정부의 과실을 반성하지 않았던 이들의 ‘사람’ 속에 철거민과 노동자 계급은 자리하고 있는지를 묻고 싶다. ‘또 하나의 가족’이라지만 결코 노동자의 가족이 되지 않는 삼성의 알량한 광고처럼 ‘사람’이니 ‘가족’이니 하는 언어에 쉽게 속을 생각이 없으니 ‘사람’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게다가 정치 구호로 흔히 쓰이지 않는, 성별을 강조한 ‘남자’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자꾸만 특전사 시절 사진이 공개되며 남성미를 강조하더니 결국 ‘대한민국 남자 문재인’이라는 구호가 탄생했다.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폐기처분해야 할 언어는 더욱 활개를 치게 생겼다. 그리고 선글라스에 군복 입고 별 두개 달린 모자를 쓴 어느 ‘독재자’의 사진이 자꾸 떠올라 당혹스럽다. 물론 현직 대통령은 군대도 안 갔다 왔고 수많은 사회 지도층 인사와 그의 자녀들이 병역비리를 일삼는 사회에서 특전사 출신의 정치인은 깊은 믿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라 방송에 나와 손가락을 다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격파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야구복을 입은 사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이미지가 강한 남성미에 집중되어 있다.
막강한 여성 후보를 의식한 탓인지 미스터코리아를 뽑는 것도 아니건만 이렇게 지속적으로 강력한 남근주의를 설파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안타깝다. 우리는 이상적 남자를 뽑는 걸까. 갈수록 생태적 감수성과 여성주의 시각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는 시대에 웬만큼 둔한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탄생하기 어려운 구호다. 나아가 문 후보의 홍보고문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던 진정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결국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남자가 먼저’로 읽히니 그 ‘사람’의 개념,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문재인 후보의 장점이었던 부드럽고 편한 인상에 이렇게 훼방을 놓는 문재인 캠프는 참 문제적이다.
이라영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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