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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진보에게 상식을 묻다 / 한귀영

등록 2012-07-29 19:12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안철수 원장이 진보와 보수 중 어느 쪽이냐는 질문에 대해 자신은 상식파라고 한 발언이 화제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 발언이 공감을 얻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시대가 상식이 부재한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동안 진보정치를 지탱해왔던 것은 8할이 ‘상식의 힘’이었다고 믿는다. 가난한 이들, 목소리 없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어야 한다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은 누구나 그 자체로 존엄할 권리가 있다는 상식의 힘 말이다. 거창한 담론이나 이념이 진보를 진보답게 한 것이 아니었다.

통합진보당에서 이석기·김재연 두 의원에 대한 제명안이 부결된 직후 이석기 의원은 “진실이 승리하고 진보가 승리했다”고 말했다. 김제남 의원은 중단 없는 혁신을 위해 기권표를 던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진실, 진보, 혁신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힘들 듯하다. 제명안 부결이 보도된 첫날만 1000명 이상이 통합진보당을 탈당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통합진보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치는 비틀거리고 있지만 최근 몇년 사이에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부쩍 늘었다. 특히 젊은층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져 지난 2월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가 20∼40대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66.9%가 진보라고 응답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진보란 대단한 이념이나 대의명분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눈칫밥을 먹여서는 안 된다는 상식,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상식, 집 없는 철거민이라고 해서 존엄함마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상식이었다. 그 상식의 절정에 김진숙씨가 있었다. 생과 사를 오가는 죽음의 공간 크레인에서 김진숙씨가 외친 메시지는 정리해고의 칼끝이 지나가는 곳,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상식이었고 이것이 ‘희망버스’로 이어졌다.

돌이켜보면 진보정치가 싹트고 확장해갔던 곳은 바로 정치가 절실하지만 부재했던 ‘상식’의 공간이었다. 그 힘이 2004년 민주노동당에 10석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총선 한달 만인 2004년 5월 여론조사에서는 당 지지도가 21%까지 상승했다. 민주노동당 당선자들이 폐교를 고쳐 만든 남원연수원에서 직접 식판을 들고 밥을 타먹고 설거지를 하는 모습은 국회의원이 특권층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노동자·농민이고 우리를 대변하는 평범한 이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면서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반면 지난 4월 정당득표율 10.3%, 13석을 획득한 통합진보당은 6월 말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에서 당 지지도가 3.9%까지 하락했다. 총선 직후 중요한 3개월이 당내 경선 부정 의혹과 폭력사태, 책임전가 등 이해하기 어려운 비상식적 행위로 채워졌다. 어떤 명분을 들이대도 국민의 눈에는 국회의원 몇자리 지키겠다는 특권에 대한 집착으로만 비칠 뿐이다.

진보정당 실험은 끝났다며 마음을 접겠다는 이들이 적잖다. 하지만 여전히 진보정치는 절실하고 진보정당이 거둔 성과는 유효하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무상급식 등 보편복지 운동을 벌여온 것이 우리 사회의 핵심 의제로 부상하기까지는 1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아직도 정치가 절실하지만 정작 정치가 부재한 수많은 공간이 있다. 죽음의 공포를 견디며 살아내고 있는 쌍용차 정리해고자, 용산참사와 같은 철거민들이 존재하는 공간이 그곳이다. 이곳이 진보정치가 있어야 할 곳이고 또 있어야 할 이유이다.

진보정치를 지탱해온 상식의 힘이 다시 진보정치를 끌어올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또 그 시간이 고통스럽더라도 말이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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