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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무상’이면 다 좋은 것일까? / 이순혁

등록 2012-08-07 19:29수정 2012-08-07 20:53

이순혁 경제부 기자
이순혁 경제부 기자
지난해 3월 첫돌을 앞두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으니, 어느덧 1년 반 가까이 됐다. 집에서는 엄마 뒤만 졸졸 따라다니다가도 아침에 어린이집 차만 나타나면 스스럼없이 선생님 품에 안겨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 한쪽이 찡해지곤 한다. 그런 아이를 데리러 일주일에 한번쯤 어린이집을 찾는다. 오후에 집에 와서 아이를 맞아줄 어르신들(친할머니 또는 외할머니 또는 친 이모할머니)이 다른 일이 있고, 애 엄마도 바쁜 날이다. 언덕길을 올라 어린이집에 다다를 즈음 아이들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그런데 올봄부터 아이가 속한 달님반(만 1살반)의 선생님 두명이 돌보는 아이가 열명에서 열두명으로 늘었다. 전면 무상보육이 시행돼 대기자가 크게 늘어나자 구립어린이집에서 영아반 인원을 늘린 것이다. 원장 선생님은 “선생님 한명에 아이 다섯명이 정원이지만 규정상 일곱명까지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서너평 남짓 될까…, 안 그래도 좁은 방이 더욱 좁아진 듯해 어린이집을 나설 때면 마음이 편치 않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는 무상급식을 중심에 놓고 치러진 선거였다. 보기 드문(!) 야권 주도형 프레임이었고, 결과적으로 시민 다수는 이 정책을 지지했다. 그래서일까,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과 정부는 0~2살 전면 무상보육에 들어갔다. 소득 수준 하위 70%에 속해 보육료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어찌됐건 무상보육이 확대된다니 막연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우선 돈 문제. 무상보육 예산 절반을 부담하던 지방자치단체들은 예산에 구멍이 났다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당국에서 정책 시행에 앞서 어떤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지 잘 살펴봐야 했건만, 결과적으로 누군가 일을 게을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더 큰 문제는 공급은 놔둔 채 수요만 늘린 무상보육 확대란 점이다. 보육료 지원 가정은 크게 늘었고,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도, 대기자 수도 늘었다. 공짜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수용하기 위한 시설과 인력은? 변화가 없다. 결국 보육교사 일은 과중해지고, 시설은 더욱 팍팍하게 운용될 수밖에 없다. 보육의 질이 떨어진 것이다.

그 결과 예산은 예산대로 쓰고도, 특별히 만족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듣기 어렵다. 기존 이용자는 보육의 질이 떨어져서, 보육교사는 과중해진 업무로 말미암아 불만이 클 수밖에 없다. 새 지원 대상자들도 낮은 서비스 수준과 긴 대기기간 때문에 입이 나와 있다. 어찌됐건 공공보육이 확대되지 않았느냐고? 맞는 말이지만, 새 지원 대상자 가운데 아이를 꼭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는데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러지 못하고 있던 경우는 과연 얼마나 될까.

제일 안타까운 점은, 무상보육이 은연중에 아이와 엄마(혹은 아빠)가 떨어져 지내는 것을 권장한다는 점이다. 0~2살 때는 엄마의 손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지만, 무상보육이 일반화하면서 엄마가 아이를 떼어놓고 일터로 나가거나 다른 일을 하는 게 당연시돼 가고 있다. ‘무상보육 실시로 변한 게 뭐냐?’는 질문에,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아이를 주변에 잠깐씩 맡기던 엄마들도 이제는 아이를 어린이집 종일반에 맡기게 된 점”을 가장 먼저 들었다.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아이와 가정, 부모권도 감안해주는 정책은 없는지 답답할 뿐이다. 지금의 획일적인 전면 무상보육을 보고 있노라면 ‘일 권하는 사회’를 심화시키기 위한 누군가의 음모가 아닌지 의심이 들 지경이다.

이순혁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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