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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싱크탱크 시각] 욕망의 순간 / 이원재

등록 2012-08-08 19:17수정 2013-05-16 16:30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산동네 공부방에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방과후면 동네 아이들을 공부방에 모아 공부하고 놀고 웃고 떠들었다. 뜨내기 대학생 교사들을 이끌던 ‘큰누님’ 운영자가 있었다. 그때 공부방이 있던 산동네는 오래전 재개발이 되어 지금은 아파트촌이지만, ‘큰누님’은 여전히 다른 지역 공부방 운영자다.

‘큰누님’의 요즘 걱정은 스마트폰과 게임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공부방 아이들도 늘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산다. 기초생활보장 대상 가정 아이들도 현실세계보다 온라인게임 속 세계에 더 빠져 산다. 유심히 보면 부모들도 비슷하다. 그렇게 말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이, 현실의 가난이 자연스레 대물림될 것 같다. 적어도 ‘큰누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문득 누군가 ‘그 아이들에게도 스마트폰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반론을 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환경을 보호하고 사회 약자를 존중하는 ‘착한 제품’을 사용하자는 윤리적 소비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반드시 받게 되는 반문이 있다. 왜 자꾸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반론에는 빠진 이야기가 있다. 사람의 욕망은 매우 다채롭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매우 제한된 욕망만을 충족시키도록 허용해 주거나, 또는 강제한다는 것이다.

지인은 착한 쇼핑, 윤리적 소비를 지향하는 온라인 쇼핑몰 회사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이마트에서 충동구매를 했던 일을 고백했다. 대형마트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보러 갔다가, 너무 싼 값에 나온 속옷이 눈에 띄어 덥석 사 버렸다는 고백이었다.

또다른 지인은 퇴근길에 아이들에게 먹일 과자를 사고 싶었다. 가능하면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고 사회적기업에서 생산해서 생활협동조합을 통해 유통하는 제품을 사고 싶었다. 하지만 퇴근길에는 그런 곳을 찾을 수 없다. 결국 대기업이 만든 제품을 대기업 프랜차이즈 편의점에서 사고 만다.

대형마트에서 쇼핑하고 고가의 스마트폰을 사고 게임을 하고 싶은 게 욕망이라면, 아이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주고 가능하면 착한 기업에서 만든 제품을 사고 싶은 것도 욕망이다. 문제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딜 가나 스마트폰과 대형마트 홍보물은 넘친다. 그러나 사회적기업 제품과 생협 매장은 찾기조차 힘들다.

과거의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는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고 싶다는 양적 성장 시대의 욕망을 대변한다. 시대는 크게 바뀌었지만, 제도는 여전히 그 안에 갇혀 있다. 더 많이 수출하고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는 대기업의 욕망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매우 강력하게 권장하는 욕망이다. 미디어도 금융도 이런 욕망은 강력히 지지한다. 반면 취약계층을 더 많이 고용하려는 사회적기업가의 욕망이나, 유기농산물을 더 많이 보급하고 싶어 하는 농민의 욕망은 지지받지 못한다. 이러니 착한 기업의 제품을 사고 싶은 소비자의 욕망도 구현되기 어렵다.

경영학에 ‘진실의 순간’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찬가지로 ‘욕망의 순간’이라는 게 있을 것 같다. 보통 사람은 늘 욕망의 순간을 맞는다. 그런데 대기업의 이윤 추구에 도움이 되는 욕망은 쉽게 실현되고, 다른 욕망은 구현 방법을 찾지 못해 쉽게 사그라진다. 욕망이 획일화되는 과정이다.

경제민주화란 어쩌면 욕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사회적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공부방 아이에게는 스마트폰을 갖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유기농산물과 ‘착한 제품’을 소비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실현할 기회도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이원재 한겨레경제연구소장 트위터 @wonjae_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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