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과정
초등학교 첫 학예회 때다. 선생님이 여자 꼬맹이들 여럿이서 에어로빅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기에 요술공주 밍키처럼 휘리릭 재주를 부리는 화려한 상상을 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틀어놓은 카세트에서 흘러나온 음악은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었다. 우리는 학예회 복장으로 빨간 반바지에 흰색 스타킹, 흰색 셔츠를 입고 가슴에는 반짝이는 종이로 빨갛고 파란 태극문양을 만들어 붙였다. 그렇게 인간 태극기가 되어 ‘건전가요’에 맞춰 수도 없이 연습을 하고 학예회 무대에 올랐다. 어른들이 좋아했다. 참 ‘건전’했다.
그런데 그 건전가요 속의 ‘대한민국’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며 “우리의 마음속의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이다. 게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라고 하니 에덴동산보다 더 훌륭한 낙원이 아닌가. 우리가 그런 나라에 살고 있다고 했다.
지금도 여전히 누구에게는 대한민국이 이렇게 ‘내 꿈이 이루어지는’ 은혜로운 땅일 것이다. 헌정을 짓밟는 쿠데타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우길 수 있고, 공천‘뇌물’은 공천‘헌금’이 되니 정당에 대한 신앙심까지 두둑한 나라다. 또한 누구는 전 재산 29만원으로 수십년을 재벌처럼 살 수 있으니 세상에 이런 천국이 어디 있을까.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오천명을 먹인 예수의 기적보다 더 찬란하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강산이 푸르고 푸르러 4대 강에 ‘녹차라테’가 흐른다고 하니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는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가 진정 가슴에서 울려 퍼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은혜로운 이 땅”에서 시위와 파업을 벌이는 학생과 노동자들은 ‘선량한 시민’이 아니라 불순한 폭도 취급을 받게 된다. 노동자들은 대단한 꿈도 아닌, 생존을 위해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파업 투쟁하다 죽도록 두드려 맞는 땅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용역회사(라고 하는 민간 폭력업체) 컨택터스는 에스제이엠(SJM) 폭력 사태 이후 자사 누리집을 통해 사과문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 사과문인지 공갈협박문인지 모호한 글에는 노조원이 ‘선량한’ 노동자와는 다른 사람들이고 ‘순진무구한’ 노조원이 아니라고 되어 있다. 즉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 선량하지 않고 순진무구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노동자는 뇌가 없고 심장이 없이 기계처럼 움직일 때만 ‘선량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정태춘의 노래 ‘아, 대한민국’처럼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폭력 국가에서 우리,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최저임금이 얼마인지 몰라도 경제민주화와 서민복지를 그야말로 순진무구하게 달달 읊어댈 수 있는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이다. 어느 대한민국이 진짜인가.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감동이 이어지는 올림픽 경기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선수’가 이루어낸 꿈에 사회는 박수를 보내며 기업은 아름답게 아파트를 안기고 ‘너구리’ 라면을 건넨다. 비닐하우스와 쪽방촌 등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불안정한 주거에 대한 국가의 복지 부재는 이렇게 주고받는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가려진다. 그뿐만 아니라, 초등학생에게 태극문양으로 옷을 입히고 어른들을 위해 열심히 춤을 추게 하던 학예회처럼, 쇼를 좋아하는 이들은 피곤한 ‘태극전사’들을 앞세워 감동적인 대한민국을 연출하려고 귀국 일정까지 통제하려 안간힘을 쓴다. 그렇게 ‘개인의 투혼’에 숟가락을 얹으며 “우리의 모든 꿈은 끝없이 세계로 뻗어가는 곳”, 아! 대한민국이라 부른다.
이라영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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