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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 / 이계삼

등록 2012-08-23 19:12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절제’는 ‘마디’, ‘매듭’, ‘알맞게 조절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절제는 지금 나에게 몹시도 그리운 단어다.

올여름은 무절제하게 더웠다. 지난 시절 한낮의 폭염은 선선한 밤공기가 매듭지어 주었고, 더러 선선한 날들이 더위의 마디를 끊어 주었다. 그러나 올여름은 한번 더우면 열흘이든 보름이든 쉬지 않고 더웠고,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더웠다.

고3 담임을 하던 시절, 수시모집 준비가 시작되는 이 무렵부터 한달여 동안 나는 무절제한 나날을 살아야 했다. 내 일과도, 아이들의 일과도 참혹했다. 3학년 교무실은 대학에 원서를 내기 위해 담임의 컴퓨터를 꿰찬 아이들과 소파에서 노트북을 앞에 놓고 상담하는 교사들, 대학에서 홍보차 나온 교수와 교직원들까지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고,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수능이 다가왔음을 알려주는 찬바람이 불었다.

수시모집 서류에 덧붙은 자기소개서에 담긴 아이들의 다양한 경험들은 많은 경우 과장되었거나 거짓부렁이었다. 아이들의 지나온 시절은 대개 무절제했다. 일상을 매듭짓고 분절시켜주는 다른 계기와 경험이 없었다. 공부에서 공부로, 경쟁에서 경쟁으로, 하나의 계기, 같은 시간을 줄창 내달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생각이 많으면 지는 게임만을 거듭하면서 아이들은 기계적 완고함 속으로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면 끝내 패배하리라는 불안 속에서 살았다. 한두 가지가 어긋나더라도 생이 그럭저럭 굴러갈 것이라고 믿을 수 없었으므로 아이들은 맹목에 지배당했다. 그런 그들에게 대학의 자기소개서가 요구하는 진취성, 창발성은 너무나 잔인한 덕목이었다. 찬바람이 불면 고3 담임은 폭풍 업무에서 풀려났지만, 아이들은 수능이라는 새로운 초긴장의 시간 속으로 다시 빠져들어야 했다.

지난여름, 폭염 속에서 한국전력은 이곳 밀양의 어르신들에게 무절제했다. 36도의 폭염 속에서 73살, 64살, 57살 주민 세 사람이 나흘 사이에 연이어 쓰러졌지만, 한전은 송전탑 공사를 강행했다. 뭔가 여지를 주고 빈틈을 허락하는 것은 패배라고 믿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린아이 같은 과대망상이었고, 주객이 전도된 지향없는 폭력이었다.

세상을 이끌어가겠다는 자들은 언제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기후변화를 넘어서기 위해, 입시 위주의 공교육을 혁신하기 위해, 전력 생산을 통한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저들은 레닌처럼 ‘무엇을 할 것인가’ 주절댄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 기후변화의 배후에 도사린 광기 어린 소비와 파괴, 교육을 둘러싼 악마적인 경쟁, 전력 생산이라는 명분으로 노인들의 숨통을 아랑곳않는 파시스트적 단순성에 마디와 매듭을 지어 ‘알맞게’ 만들어줄 수 있는 길은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라는 절제의 정신에서 비롯한다고 나는 믿는다.

올여름 폭염을 지켜보며 기후의 패턴이 뭔가 크게 잘못되어 버렸다는 공포를 느꼈다면, 대안을 위해 무엇을 더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를 고민하라. 입시 경쟁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요상한 제도를 새로이 발명하려 들지 말고, 자식을 위한답시고 뭘 더 해주려 하지 말고, 아이들이 지금 무어든 더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우선 숨통을 틔워주라. 그리고 그냥 내버려두라. 칠순 노인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분신자결하면서까지 울부짖었다면, 지금도 노인들이 공사를 막다가 쓰러지고, 송전탑 구덩이 속에 들어가 죽겠다며 울부짖으면, 일단 공사를 중단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라. 제발, 세상을 위한답시고, 뭘 더 해보겠다고, 완성하겠다고, 나서지들 말라!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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