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문화방송 사옥 앞에 가면을 쓴 일군의 무리가 나타났다.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의 퇴진을 위한 ‘1천만 서명운동’에 나선 이 회사 노조원들이다. 그들이 착용한 짙은 수염의 남성 얼굴 가면은 단박에 눈길을 끌었다. 바로 ‘가이 포크스’ 가면이다.
가이 포크스는 영국의 실존 인물이다. 그는 1605년 가톨릭을 탄압하는 제임스 1세를 암살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궁의 지하 공간에 대규모 화약을 설치했다가 들통나 화형을 당했다. 역사에 ‘화약 음모’로 기록된 사건이다. 영국에선 그의 거사일인 11월5일을 ‘가이 포크스 데이’라 부르며 사람들이 그를 상징하는 가면을 쓰고 불꽃놀이 등을 즐긴다.
체제전복을 꿈꾼 반항아 가이 포크스를 21세기에 크게 되살린 것이 영화 <브이 포 벤데타>(2005년·제임스 맥티그 감독)다. 영화의 무대는 완벽한 통제사회가 된 2040년의 영국이다. 이곳에선 피부색이나 정치적 성향, 성적 취향 등이 다른 사람들은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가고, 남은 이들은 거리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와 녹음장치의 감시를 당한다. 이런 세상에서 주인공 ‘브이’(V)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나타나 인간의 위엄과 자유를 찾기 위해 싸운다. 브이의 목표는 400년 전의 가이 포크스처럼 의사당 폭파다.
그 뒤 가이 포크스 가면은 2008년 사이언톨로지교에 항의하는 해커 그룹 ‘어노니머스’ 회원들의 시위에 등장하는 등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2008년 7월 서울의 촛불집회에선 인터넷 커뮤니티사이트 ‘디브이디(DVD) 프라임’의 회원 수십명이 가이 포크스 가면 차림으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문화방송 노조원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쓴 것은 감시와 통제가 지금 문화방송을 휩싸고 있다는 상징적 표현 아닐까.
정재권 논설위원 j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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