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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그 길이 사라졌다 / 노형석

등록 2012-09-24 19:23

서울 명동성당이 종현 언덕을 깎아 터를 닦은 건 1887년이었다. 종현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 장수 양호가 숭례문 종을 떼어 걸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첫 순교자 김범우 집터가 근처여서, 프랑스인 푸아넬 신부는, 1883년부터 땅을 ‘빼앗다시피’ 해서 조금씩 사들였다고 기록했다.

조선 조정은 성당이 언덕 아래 역대 임금 영정을 모신 영희전 전각을 ‘불경하게’ 내려다볼 것을 우려했다. 갈등 끝에 공사는 1892년에야 시작됐고 1898년 끝났다. 설계자 코스트 신부는 서북쪽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고딕식 성당을 앉혔다. 진입로도 그쪽으로 뚫었다. 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속내였을까. 당시 성당 언덕길엔 숲이 무성했다. 구한말과 1950년대 사진에 오솔길 같은 풍경이 보인다. 86년 정비공사로 숲은 사라지고 진입로는 콘크리트로 덮였지만, 이듬해 6월 항쟁으로 길은 다시 빛나게 된다.

명동성당 오르는 길은 한국인에게 집단 기억의 공간이다. 1909년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다녀오던 매국노 이완용을 이재명 의사는 이 길 어귀에서 칼로 찔렀다. 작가 박완서의 데뷔작 <나목>에서 주인공 이경과 박수근의 분신인 무명화가 옥희도는 이 길을 거닐며 연정을 쌓는다. 6월 항쟁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지켰던 해방구가 된 이래 언덕길 따라 빈민·노동자들의 천막농성장이 올망졸망 늘어섰던 풍경도 우리는 기억한다.

‘뾰족탑’과 더불어 역사의 이정표였던 이 길이 올가을 재개발 삽날에 무너졌다. 길은 사라지고, 신도들은 가설다리로 출입한다. 길 지하에 주차장과 임대시설을 들이려고 벌인 일이다. 정호승 시인은 시 ‘명동성당’에 이렇게 썼다. ‘바보가 성자가 되는 곳/ 성자가 바보가 되는 곳…서울은 휴지와 같고/ 이 시대에 이미 계절은 없어…’. 지금 명동성당 올라가는 길엔 가을이 없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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