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작년 연말 통합진보당 출범을 앞두고 당명이 논의되던 시기였다. 국민참여당 당원들이 부산시당사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졌다. 사진 속 그들은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어떤 문장을 적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 “‘노동’이란 단어로 통합당에 재 뿌리지 마라!” 나는 그 사진을, 정확히 말해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인상은 평범했다. 어딜 봐도 자신의 견실한 노동으로 삶을 꾸려가는 한국의 보통사람들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저토록 노동이란 두 글자를 혐오하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자기 삶의 지평이자 수단을 저리도 경멸하게 만들었을까?
사실 이런 질문은 순진한 물음이다. 이유는 명백했다. 당명에 들어가는 ‘노동’이란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저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깨어있는 시민들”에게 ‘진보’는 허용할 수 있는 단어이지만 ‘노동’은 안 될 말이었다. ‘노동’은 과격하고 독선적인 운동권의 언어였고, 극소수 ‘빨갱이’들이 특히 선호하는 단어다. 그래서 그것은 “통합에 재를 뿌리는” 말이 된다.
조직된 노동자의 힘이 약해지고, 노동 이슈를 전면에 내건 진보정당이 게토화하면서 노동자적 관점은 물론이고 ‘노동’이란 단어 자체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해지는 것 같다. 과거 ‘노동’이 점유했던 자리를 차지한 것은 ‘20 대 80 사회’나 ‘1% 대 99%’ 같은 새로운 레토릭이다. 특히 월가 점거 시위 이후 이런 표현은 ‘대세’가 됐다. 하지만 그 ‘99%’에는 부동산과 금융거품에 편승해 불로소득을 챙긴 고소득 정규직 노동자와 생활임금조차 못 버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모두 포함된다. 이런 질문으로 바꿔 보자. 8억원짜리 아파트를 사느라 빚을 진 ‘하우스푸어’와 비닐하우스에 사는 ‘비닐하우스푸어’를 싸잡아 ‘빈민’(푸어)이라 부르는 것이 온당한가?
최근 트위터에서 유행한 ‘출판사 옆 대나무숲’ 등의 계정은 악질적인 ‘갑’들에 착취당하는 ‘을’의 비명을 생생하게 전하며 공감을 샀지만, 막상 그들 개개인의 불평이 노동자의 각성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나무숲의 많은 ‘을’들은 자신이 약자라서 착취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냉소주의를 되새길 뿐이다. 노동을 소거하고 계급 분석을 생략한 자본주의 비판은 복잡하고 첨예한 계급 적대의 동학을 단순한 마니교적 신화로 만들고 만다. “저들 상위 1%의 비도덕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이번 대선 최대의 정책의제가 경제민주화라고 한다. 유력한 세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지만 정작 내용은 하나같이 두루뭉수리이고, 실체가 불분명하다. 당연하다. 노동의제에 대한 구체적 고민이 없기 때문이다.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일갈했듯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노동”이다. 경제민주화가 종종 재벌 개혁과 등치되곤 하지만, 단언컨대 노동권의 강화 없는 재벌 개혁은 실현될 수 없는 환상이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선출된 권력이 재벌 앞에 무력해진 참담한 현실에 대한 고백이었다. 삼성과 이건희에 대해 유력 대선 주자들이 입도 뻥끗하지 못하는 이런 나라에서 5년짜리 정치권력이 재벌 지배구조를 개혁할 수 있을 리 없다.
스웨덴이 재벌과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낼 수 있었던 건 스웨덴 재벌이 유별나게 착해서가 아니다. 여차하면 자본에 막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강대한 조직노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당연시될 정도로 노동자의 힘이 강해지면 재벌 개혁은 그제야 실현 가능한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노동이란 두 글자를 사회적으로 복권시켜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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