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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필름이여, 안녕 / 민규동

등록 2012-10-17 19:29

민규동 영화감독
민규동 영화감독
얼마 전 영화제에서 오랫동안 짝사랑해오던 한 기자를 만났다. 영화제나 심사 등으로 몇년에 한번꼴로 만나긴 했다. 자주 못 보지만 늘 그리운 사람이기 때문에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는다. 20세기엔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녔고, 10여년 전엔 디지털카메라로 바뀌었다가, 요즘은 휴대폰이다. 상대가 사진을 찍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마구 찍어버리고는 반드시 그에게 보낸다. 나의 뻔뻔함에 상대는 민망해하지만, 그걸 지워버리는 건 그쪽 자유이다. 대신 난 사진 속 그 공간, 옷, 머리, 표정을 통해 그날의 감정, 체취, 에너지를 기억해낸다.

내 사진을 늘 불편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찍은 사진은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아, 실력이 늘었나,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12년 전 전주영화제 때 찍은 흑백사진을 달라는 것이다. 아, 맞다. 그때 장염에 걸려 퀭한 채로 노트북에 매달려 기사를 쓰고 있던 옆모습을 찍었었다. 그 사진, 어딨더라. 분명히 인화해서 어딘가 뒀는데. 집에 와서 한참을 뒤졌다.

서재엔 중학교 때부터 찍은 모든 필름의 네거티브가 켜켜이 쌓여 있다. 또 거대한 비닐바구니에는 인화는 했지만 앨범에 정리하지 못한 사진이 수천장 들어 있다. 그 옆엔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새 앨범이 5권이나 포개져 있다. 그의 사진을 찾느라 여기저기 뒤지다가 예전 생각이 났다. 그땐 넘쳐나는 사진을 어디다 둘지 몰라 늘 어지러웠기에 사진을 모조리 스캔받아 파일로 보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간절히 욕망했었다. 네거티브 필름 스캔이 있긴 했지만, 너무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하던 시절이다. 언젠가부터는 앨범을 세워둘 공간도 부족해졌고, 인화한 사진들은 조만간 조만간 하면서 미뤄두기 시작했다. 때마침 디지털카메라가 등장했고, 빛의 속도로 그 품에 안기었다. 그 후 10년 동안 예전 사진들은 여전히 수면상태다.

우스운 건 그사이 스캔과 인화의 욕구가 전복됐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디지털카메라로 무수히 많은 사진을 찍어댄다. 처음부터 모든 사진을 날짜별 폴더로 만들어 보관해 왔지만, 그것도 쌓이다 보니 사진 파일이 넘쳐나서 그걸 다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 즉, 사실상 어디에 어떤 사진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특정 사진을 찾아낸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 사진 폴더들을 볼 때마다 요즘은 이런 고민에 빠진다. 아, 이 사진들을 모조리 인화해서 앨범에 보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듣자하니 내년 봄이면 필름 상영관이 일반 극장에서 사라진다고 한다. 그렇다. 어느새 필름으로 영화 보는 시대가 끝나간다. 에스에프 영화의 미래처럼 한참 뒤에나 찾아올 거라고 믿었던 예상이 현실로 들이닥친 것이다. 20분마다 릴을 바꿔가며 필름을 영사하던 예전 영사기사님들은 이제 <시네마천국> 같은 영화 속의 전설로 사라진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영화는 무서운 속도로 진화중이다. 그렇다고 애통하지는 않다. 일찍이 멸종했던 변사들의 무성 흑백영화에 대해 태어나면서부터 유성 컬러영화를 봐온 우리 세대의 관객들이 무슨 상념이 있었겠는가. 출산 순간부터 얼굴로 다가오는 스마트폰의 섬광을 보고 자란 요즘 아이들에게 지글지글 필름의 향수가 무슨 의미이겠는가. 위로가 되는 건, 플랫폼이 바뀌어도 담기는 건 변함없이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난 그의 사진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도 다음에 만나면 또 찍을 것이다. 지금 내가 인화하는 방식은 상대라는 서버를 이용하는 것이다. 찍자마자 보내버리고 그 순간을 공유한다. 파일이냐 앨범이냐를 뛰어넘는 진화된 기억 방식이라고 우기면서.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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