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술사의 거장 피카소(1871~1973)는 17세기 바로크 화가 벨라스케스(1599~1660)를 태양처럼 떠받들었다. 특히 ‘회화사의 영원한 교본’이라는 벨라스케스의 대작 <시녀들>은 평생의 도전 상대였다. 1897년 16살 소년화가 시절 프라도 미술관에서 처음 만난 이래 그는 말년까지 수없이 이 걸작을 변주해 그려냈다. 펠리페 4세의 왕녀 마르가리타와 시녀들, 이들을 지켜보는 거울 속 왕과 왕비, 그리고 다시 왕과 왕비(혹은 관객)를 지켜보는 화가…. 시선의 주체에 대한 성찰을 던지는 <시녀들>의 신비스런 사실성은 피카소 입체파 화풍의 노둣돌이 된다. 그는 생전 회고했다. “나는 열다섯 살에 벨라스케스처럼 그렸다. 덕분에 80년간 아이처럼 그릴 수 있었다.”
그림에 진실이 하나뿐이라면, 누가 똑같은 주제를 수백번씩 그릴까. “이 그림에 절대적 주체는 없다”고 철학자 푸코가 단언했듯, <시녀들>은 피카소 말고도 고야, 마네, 달리 등 숱한 후대 화가들에 의해 당대 감각으로 재해석됐다. 미술사 걸작은 뒷날 누군가 타고 넘어야 하는 숙명을 지닌 통나무와 같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천하제일 비색청자’에 국민화가 이중섭(1916~56)의 그림 모티브가 됐다는 포도동자무늬 표주박 모양 고려청자 주전자가 나왔다. 잘록한 몸체 위 포도 넝쿨 곳곳에 매달린 동자들의 앙증맞은 표정과 몸짓이 돋보이는 명품이다. 이중섭의 친구 구상 시인은 고인이 청자병을 즐겨 감상하며 아이들 그림의 영감을 얻었다고 증언했다. 첫아들을 병마에 잃은 뒤 동심에서 시대의 위안을 찾았던 작가의 내면이 청자병 동자들 속에서 새삼 아른거린다. 청자병 앞에는 이중섭 그림에 영향을 줬다는 간략한 설명만 붙었다. 왜 국공립 컬렉션 등에 다수 소장된 이중섭 그림을 함께 전시하지 않았을까.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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