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동 영화감독
다다다닥 한글로 쳤는데, 고개 들어 화면을 보면, 영어로 쓰여 있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키보드의 한/영키를 눌러 오타를 고치다 보면, 하루에 몇 분씩 쌓이는 이 어이없는 고쳐쓰기 과정에 빼앗기는 인생의 총시간이 얼마나 될지 씁쓸한 셈을 해보게 된다.
키보드도 없던 시절엔 영어가 세계 공용어인 듯한 세상이 이토록 빨리 올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그래서인지 내게 허락된 유일한 학습지는 한자 학습지였다. 덕분에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천자문을 줄줄 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자에 대한 애착은 중학교 첫 한문 수업 때 꺾였다. 선생님이 천자문 아는 사람 있느냐고 묻자, 너도나도 하늘 천 따지 가마솥에 누룽지라고 외어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계속해보라는 표정으로 기다렸는데, 사실 금세 잠잠해졌다. 날 제외하곤 말이다. 난 한참을 더 외우다가 선생님 표정이 안 좋아진 걸 눈치채고서야 멈췄다. 선생님은 ‘네가 한자를 좀 아냐’고 하더니 이제부터 말하는 단어가 한자어인지 순우리말인지 맞혀보라 했다. 난 족족 틀렸다. 당연히 우리말이라 생각했던 글자들이 다 한자어였던 것이다. 마지막 문제가 기억난다. 김치. 난 머뭇거렸다. 설마 김치도 한자인가. 작은 충격과 함께 한자에 정이 뚝 떨어졌다. 승리의 미소를 머금은 선생님은 끝내 답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꼬마와의 대결에 자존심을 걸었던 그의 한자에 대한 자부심이 지금은 한풀 꺾이셨을 터이다.
일전 문학상 심사 모임 때 옛날 한식당에 갔는데, 60년대 신문이 벽에 붙어 있었다. 그땐 무슨 기사들이 있었을까, 궁금해 읽어보려는데, 버퍼링 걸린 낡은 컴퓨터처럼 제대로 읽어내지를 못했다. 조사와 어미를 제외한 글자가 죄다 한자였기 때문이다.
난 자국의 문자를 끝내 지켜낸 나라들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들은 오래전 쓰여진 책들을 지금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이나 광해의 실록을 눈앞에 펼쳐준다 해도, 기실 중국 책과 다를 바 없으니 읽지 못할 것이다. 독립선언문의 녹음 파일이 있다 해도 해석이 힘든 암호문일 것이다. 제사상의 지방도, 가문의 족보도, 옛날 영화 포스터도 읽기 힘들다. 예전 문맹률을 따져보면 더욱 냉혹하지만, 무지몽매한 민중들은 세상의 비밀을 모른 채 가진 자의 삶에 충실히 복무하는 편이 낫다는 식자들의 철학과 한글이 중국 문자의 한국식 발음표기에 불과하다는 인식, 또 한글만으론 깊고 섬세한 뜻을 제대로 전해낼 수 없다는 열등감에, 한글은 출생 후 500년이 넘도록 한자의 위세 앞에 주눅 들어 있었다. 믿기 힘들지만, 25년 전까지만 해도 한자를 모르면 신문을 읽을 수 없었다. 처음 <한겨레>가 순한글 신문을 선보였을 때, 마치 벌거벗은 몸을 직접 마주한 느낌처럼 눈이 부셨다.
한글날이 다시 국경일이 되었다. ‘사랑해’라고 말하고 ‘愛’라고 쓸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아픔을 떠올려보면, 한글만으로도 소통 가능한 시대에 산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겨우 되찾은 이 평화의 시절이 얼마나 오래갈까, 조마조마하다. 인류사엔 소수의 언어를 제거하고 자신만의 언어로 대통합을 꿈꾸는 권력들이 무수히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하나, 그 어떤 권력도 영원하진 못했다. 지금의 균형 또한 언젠간 깨질 것이고, 지구의 통계적 표준어는 또 다른 언어로 대체될 것이다.
그렇듯 한국 근현대사의 복잡한 서사시 속에 중국이 밀려나고 미국이 들어왔다. 우리의 키보드가 말해주는 좌한자, 우한영의 키 그리고 그렇게 양쪽으로 자리를 내주고 좁아진 스페이스 바의 슬픈 정세. 더 쪼개져 다른 언어가 추가되는 끔찍한 미래가 없기를 빈다. 그저 단순히 오타작렬로 지웠다 다시 쓰면서 낭비하는 인생이 아까워서라도.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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