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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풍성한 언어로 초심을! / 임범

등록 2012-11-26 19:22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콜롬비아 마약조직이 미국 마약수사관을 납치했다. 백악관에서 대책회의를 하는데 마땅한 답이 나오질 않는다. 대통령이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운다. 비서실장이 따라나와, 담배 피우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잔소리한다. (대통령)“조지 버나드 쇼가 말했네. 누구든 더 오래 살 수는 없다고. 다만 더 오래 사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비서실장)“버나드 쇼의 말이 아닌 것 같은데요.” (대통령)“그런가. 나도 헷갈리는군.”

대통령 주치의가 군의관이다. 대통령에게 감기 예방주사를 놓는다. (대통령)“이렇게 쿠데타가 시작되는 건가? 특별 경호부대를 불러야겠구먼.” (주치의)“쿠데타가 일어나면 특별 경호부대가 과연 당신 편에 설까요?” (대통령)“그것도 골치 아픈 문제구먼.”

10여년 전에 나온 미국 텔레비전 드라마 <웨스트윙>은 미국 대통령과 그 참모진의 이야기이다. 여기 나오는 대통령은 말이 무척 많다. 누구든 만나면 농담을 하고 유머를 구사한다. 수시로 경구를 인용하고 출처를 되묻는다. 그러다 보니 농담 때문에 언론의 구설에 오르는 일도 생기는데 대통령은 말한다. “조크는 내 매력과 인기의 비결이란 말이야.”

대통령만이 아니다. 그 참모들은 수다스러운 대통령을 흉보면서도, 자기들끼리 말할 때도 농담, 유머, 경구의 인용을 수시로 섞는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하는 두 참모는 적절한 글귀를 찾느라 서로의 표현이 후지다고 옥신각신하며 골머리를 앓는다. 그렇게 작성된 연설문을 대통령이 몇 부분 고쳐서 읽은 뒤에, 작성자와 또 농담 같은 설전을 주고받는다.

드라마의 대통령과 참모진은 하나같이 언어에 집착하며 드라마는 그 모습을 비중 있게 중계한다. 왜 그럴까? 대통령의 말대로 ‘농담이 인기의 비결’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해도 마찬가지다. 뭐냐면, 그들은 언어를 신뢰하고, 언어를 신뢰함으로써 정치를 신뢰하는 거다. 드라마에선 미국 정치가 멋있게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 나라든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현실 정치에 만족할 수 있을까. 드라마의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언어에 집착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읽히는 건, 현실정치가 아니라 정치의 가능성을 믿거나 최소한 믿으려고 애쓰는 마음가짐, 즉 정치의 초심이다. 초심을 그렇게 표현하는 연출만으로도 드라마는 매력 있었다.

지금이 대선 국면인데 후보들에게서 유머나 농담, 경구의 인용 같은 걸 듣기가 힘들다. 정권과 함께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이들이 이렇게 많으니 유머의 여유를 바라는 게 무리일지도 모른다. 전쟁 같은 선거! 그렇게 되는 과정에서 당연히 정치 불신도 깊어졌을 거다.

그 어느 틈에서 말 잘하는 정치인을 싫어하는 풍토가 생겼고, 언제부턴가 정치인들이 차라리 어눌해짐으로써 신뢰를 얻으려고 하는 모습도 나타났던 것 같다. 정치 불신이 언어 불신을 만들었고, 말들은 더 방어적이 되고 추상적인 언어와 형식적인 수사가 늘어난 게 아닐까. 역으로 공허한 말들이 정치의 신뢰를 더 추락시키고…. 유머는 추상적이거나 막연하기 힘들다. 그러면 재미없다. 유머야말로 디테일이 생명이고, 그래서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비유나 인용도 마찬가지이다.

한 극작가는 “진실을 감추는 말도 많지만, 진실을 드러내는 말도 많다”고 했다. 정치도 마찬가지일 거다. 세상을 나쁘게 만드는 것도 정치지만, 그걸 바로잡을 것도 정치밖에 없다. 언어와 정치의 공통점 아닐까. 언어의 다양한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선,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선 정치의 초심을 살려내기 힘들다. 어떤 선거에서든 통하는 후보 선택의 기준이 있다면 이런 것 아닐까. 정치에의 불신, 언어에의 불신이 깊을수록 당선되기 쉬운 후보가, 실제로는 당선돼선 안 될 후보라는 것.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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