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박근혜 후보의 대선공약을 차분히 읽어보았다.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았다. 힘든 걸로 치면 안철수 후보, 문재인 후보의 공약들이 더했다. 아무래도 기대가 있었던 까닭이다. 안철수 캠프의 공약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문재인 캠프의 공약은 상대적 완성도가 높았지만 거대야당 후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불만스럽다. “10년 전 노무현 캠프의 공약보다 개혁적이고 혁신적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안철수 캠프의 공약 중에선 그래도 교육과 정보통신(IT) 분야 정책만큼은 평가해줄 만했다. 더 다듬어서 문재인 후보의 공약에 포함시키고 경선에서 탈락한 손학규 후보 쪽 정책 아이디어들까지 받아서 녹여내면 더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비정규 노동 및 소득·자산 불평등 문제에 대해 획기적인 조처가 없다면 그것을 두고 개혁의 청사진이라 부를 수는 없다. 만약 노동 분야 정책을 대폭 보강할 경우, 문재인 캠프의 공약은 어떤 모습이 될까.
아마도 ‘핀란드 모델’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핀란드는 잘 알려진 대로 아이티 산업이 매우 발달한 북유럽의 선진국이다. 특히 ‘낙오자 없는 학교’를 표방하면서도 탁월한 학업성취도를 끌어내는 핀란드 교육은 많은 나라들의 롤모델이다. 핀란드는 이런 교육환경이 첨단산업의 혁신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이상적인 선순환 구조를 지닌 사회다. 또한 핀란드는 노조가입률이 70%가 넘는다. 강력한 노동조합을 바탕으로 노사정 타협모델이 정착한 나라다. 노동권 강화가 문재인 공약의 전제이자 핵심이 되어야 하는 건 바로 그래서다.
반면 박근혜 후보의 공약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있을까. 혹은 그가 이상적인 사회로 생각하는 국가는 어디일까. 그와 새누리당이 평소 강조하는 특정 단어들, 그리고 이번 대선 공약을 종합해 본 결과, 떠오르는 국가는 딱 하나뿐이다. 싱가포르. 1인당 국민소득으로 따지면 싱가포르는 아시아 1, 2등을 다투는 선진국이다. 거의 5만달러에 이르는 1인당 국민소득에, 거리는 놀랍도록 청결하고 세련됐다. ‘여성과 어린이들이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나라’로도 유명하다. 범죄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하지만 그건 일면일 뿐이다. 초대 총리 리콴유는 31년간 독재자로 군림했고 아들 리셴룽은 2004년 제3대 총리가 됐다. 리콴유는 ‘박정희의 빅 팬’으로도 유명하다. ‘아시아인에겐 민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장을 늘어놓다 1990년대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논쟁까지 벌인 사람이다. 싱가포르는 독재국가일 뿐 아니라 언론·집회의 자유를 혹독하게 탄압하는 나라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2012년 발표한 세계 언론자유도 순위에서 싱가포르는 135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북한 178위, 중국 174위, 한국 44위, 일본 22위였고 1위는 핀란드였다. 언론자유라는 면에서 싱가포르는 대한민국보다는 중국이나 북한에 훨씬 가까운 사회인 셈이다. 싱가포르의 국민소득이 높다고 해서 모든 시민이 잘산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2009년 발표한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의 빈부격차는 홍콩에 이어 세계 2위였다(한국은 16위, 일본은 26위).
두려운 건 박근혜 후보나 그 공약 따위가 아니다. 한국에 사는 많은 사람이 사실은 싱가포르 같은 나라를 ‘좋은 사회’ 내지 ‘모범국가’라 여긴다는 점이야말로 모골이 송연한 것이다. 강력한 치안, 일벌백계의 가혹한 엄벌주의, 높은 국민소득, 분배보다 성장…. 지금 당장 여론조사를 하면 이런 것들 대신 인권이나 표현의 자유 같은 건 조금 희생해도 된다고 답할 사람이 결코 적지 않을 터이다. 우리 안의 ‘싱가포르 판타지’, 그게 바로 박근혜의 힘이다.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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