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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길의 뇌관 / 서해성

등록 2012-12-21 19:20

서해성 소설가
서해성 소설가
길에도 뇌관이 있다. 뇌관 없는 노정은 이미 죽은 길이다. 시의 뇌관이 낱말과 낱말 사이에 숨어 있다 저마다 가슴에서 터지듯 길의 뇌관은 발밑에서 폭발한다. 뇌관이 나그네를 위하여 길목마다 기다렸다가 터져 오르는 건 아니다. 불편과 노독이 동반하지 않은 노정에는 뇌관이 나타나질 않는다. 분노가 없는 자에게 또한 길은 화약 품은 가슴을 내주질 않는다.

소설은 발화지점을 따라 길이 생긴다. 사상의 길도 마찬가지다. 끝없는 뇌관을 장착하고는 표지 바깥으로까지 마침내 불꽃이 튀어, 불타는 책이다. 책장에 갇힌 한낱 창백한 이론과 달리 이건 차라리 문자로 표기된 근육이다. 대중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방화범이 문학, 철학, 또 영화에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노무현이 어제그제 비로소 죽었다. 죽음의 이름은 18대 대선이다. 스스로를 버려 다시금 대중의 심장에서 깨어났던 그가 개표방송 자막 사이로 칸칸이 내려가는 걸 지켜보는 동안 디지털 모니터에는 깊게 기흉이 파이고 있었다. 역사의 묘갈은 48에서 멎었다. 오직 가슴의 언어로 비손컨대 그에게 평안 있으라. 그날 당선자는 51.6이라는 상징적 숫자로 가업을 계승했고, 희미한 권력자는 불안하면서도 득의에 찬 생일상을 받았다.

아침 없는 아침이 그렇게 오고야 말았다. 모든 패배는 예의가 없다.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져도 다르지 않았다. 어김없이 그는 정문을 통해 알몸으로 뛰어 들어왔다. 울대 갈라지도록 불러대던 노래가 미처 식기도 전에, 취한 깃발을 거두기도 전에. 콧구멍이 위로 뚫린 천둥벌거숭이인 양 제 눈물을 들이마시면서 앓던 새벽이 지나자 거대한 고요가 밤새 아무런 울음소리도 듣지 못한 양 거리와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지난 5년 동안의 쓰라린 노정을 끝내고 싶었던 사람들 아침상에는 굳이 여러 찬이 필요치 않았다. 맨밥에 간을 맞추는 데는 잠 못 이루고 흘린 눈물로도 충분했다.

삶의 노정이 썩지 않는 건 이 눈물 때문이다. 모든 눈물에는 얼굴이 있다. 눈물은 눈이 아니라 제 가슴을 닮은 모양으로 떨어져 내린다. 여전히 눈물은 약이다. 앞으로도 땀과 더불어 눈물은 험한 노정의 필수품이다. 눈물의 양만큼 길은 새로운 뇌관을 잉태한다.

대선 기간 동안 어떤 역사의 창도, 어떤 말의 칼도 하물며 살아있는 과거를 찔러 피 한 방울 얻지 못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내일은 눈앞에서 거짓말같이 곧장 어제로 가버렸다. 빨간 망토를 걸친 채. 다만 장하였나니, 거룩한 패배는 언제나 나아갈 길을 패배 안에서 만들어내 왔음을 역사의 길이 일러주고 있다. 새 세상이 오다가 문득 멈춘 자리에는 높은 고개가 솟아올랐다. 여기를 넘어서야 하는 게 첫 노정이다.

길은 죽음을 몰라 이 아침 또 길로 떠나니, 이제 차비를 해야 한다. 여전히 그 5.27 새벽인 채로 싸워온 광주를 생각하면 일어서자는 말조차 사치스럽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길의 사명이다. 그저 남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는 건 길의 소비에 지나지 않는다. 길은 길에 저항할 때만 새 길이 생긴다. 이것이 길의 운명이자 길을 내야 하는 사람들의 거역할 수 없는 팔자다. 길의 뇌관에 불을 붙이고 폭발케 하려면 가슴에는 곧은 심지가, 머리에는 지도가 있어야 한다. 이 슬픔과 착실한 노선이 그것이다.

오리온 별 셋이 대지 끝에 내려앉는 오늘은 해가 죽는 날이다. 사흘 뒤 그 해는 새로 태어난다. 미트라도, 크로노스도, 사투르누스도, 그리고 예수가 이날 탄생한 까닭도 이것이다. 가장 깜깜한 낮에 떠먹는 팥죽은 입으로 하는 광합성이다. 해가 없는 날 해를 먹는 자는 해를 품는 법이다. 우리가 붉은 입술로 새 길을 불러내는 거다.

서해성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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