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제18대 대선에서 최고의 화제는 역시 50대의 경이적인 투표율이었다. 출구조사 값이긴 하지만 확실히 89.9%라는 수치는 놀라웠다. 여러 언론에서 ‘세대전쟁’이란 말이 심심찮게 튀어나왔고 이들의 선택을 분석하는 글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주장 가운데 상당수가 개인들의 경제적 처지가 정치적 선택으로 곧장 이어진 거라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50대가 토건경제에 대한 집착 때문에 90%나 투표에 참여해서 대부분 박근혜를 찍었다’는 식의 주장이 그것이다.
그런데 50대는 다른 세대에 비해 심하게 양극화된 집단이다. 자산가가 많은 반면 빈곤선에 걸친 영세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보다 훨씬 많다. 실제로 50대의 비정규직 비율은 20대와 더불어 지난 10년간 다른 세대를 압도했다. 따라서 핵심은 이것이다. 그렇게 분절된 50대가 어떻게 그렇게 강력하게 결집했고, 또 상당수가 동질적인 정치적 선택을 하였는가.
이번 대선에서 첨예한 사회·경제적 의제는 한번도 제대로 점화된 적이 없었다. 모든 유력 후보가 ‘복지’를 논하고 ‘경제민주화’를 선언하는 상황이 역설적으로 이 의제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는 쪽으로 작용했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경제적 이해관계 또는 계급성이 그대로 투표에 반영되는 사회가 아니다. ‘계급배반 투표’가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이런 사회에서는 정치적 변동폭이 커지고 이데올로기나 문화적 코드가 상대적으로 힘을 발휘하기 쉽다. 이런 맥락을 하나하나 고려해보면, 문재인 후보를 찍은 사람들이나 박근혜 후보를 찍은 사람들의 선택을 ‘경제적 합리성’의 영역에서 설명하는 건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2012년 대선 국면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한 요소가 뭐였는지를 떠올려보면 답이 나온다. 이른바 ‘안철수 신드롬’이다. 이 현상의 기층에 있는 것은 개혁의 당위라기보다 ‘힐링’(치유)의 열망이었다. 이 열망은 분명 한국 사회에서 일정한 진보성을 띠지만 본질적으로 진보적 정서는 아니다. ‘힐링 열풍’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피로감과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만들어낸 보수적·방어적 정서다.
제18대 대선은 좌·우파 이념 전쟁이 아니라 감수성 전쟁이었다. 누가 ‘힐링’하고 ‘안정’시킬 수 있는가, 누가 그 감수성을 더 잘 전하는가의 싸움이었다. 민주당이 ‘독재정권 대 민주화세력’이라는 틀로 선거를 끌고 갈 때, 새누리당은 경제성장, 강력한 치안 및 안보, 온정적 복지를 내세우며 ‘엄격하되 따뜻한 보수’ 전략으로 맞섰다. 새누리당의 전략이 국민들은 물론 안철수까지 고려한 것이란 점에서 캐치프레이즈처럼 “100% 대한민국”이었던 데 반해, 민주당의 전략은 오직 박근혜만 보고 만든 것이었다. 민주당과 이른바 ‘친노 세력’은 보수 정서를 정면돌파할 진보성을 부각하지도, 그렇다고 중간층에 안정감을 주지도 못했다. 1987년 식의 낡은 대결구도만 고집하며 성마른 공격성만 드러냈을 뿐이다. ‘친노’와 ‘친북’에 대한 중간층의 반감 역시 안철수 후보가 무대에서 내려간 뒤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결국 정권교체는 실패로 돌아갔다.
선거가 끝난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일부 ‘깨어있는 시민’들은 박근혜를 찍은 50대를 ‘꼴통’으로 규정하거나 재검표를 요구하고 있다. 기분은 알겠지만 선거중독에서 빨리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박근혜 시대는 이미 와 있다. 단지 청와대에 입주하지 않았을 뿐이다. 선거만이 아니라 우리 삶 구석구석이 정치의 공간이고 투쟁의 장이다. 그 작은 싸움 하나하나가 모이고 쌓여야 비로소 진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 제18대 대선의 교훈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박권일 계간 ‘R’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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