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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길을 찾아서] 월남자들에게 살충제 쏟아부은 미군 / 오재식

등록 2013-01-20 19:25수정 2013-01-20 19:38

1947년 2월께 해주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오재식은 남녘땅에 도착하자마자 미군들에게 디디티(살충제) 세례를 받으며 느꼈던 불쾌함을 내내 잊지 못했다. 디디티는 전염병 예방용으로 한때 항공살포까지 했으나 위해성이 드러나면서 1971년 사용이 금지됐다. 사진은 한국전쟁 전후 미군들이 피란민들에게 디디티를 뿌리는 모습.
1947년 2월께 해주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오재식은 남녘땅에 도착하자마자 미군들에게 디디티(살충제) 세례를 받으며 느꼈던 불쾌함을 내내 잊지 못했다. 디디티는 전염병 예방용으로 한때 항공살포까지 했으나 위해성이 드러나면서 1971년 사용이 금지됐다. 사진은 한국전쟁 전후 미군들이 피란민들에게 디디티를 뿌리는 모습.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11
1947년 2월께 오재식은 이름도 모르는 노부부의 도움으로 안내원을 다시 만나 무사히 해변에 대기중인 나룻배에 올랐다. 배에는 세 남자가 더 있었다. 배는 출발했지만 38선을 넘기까지는 절대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재식은 내내 가슴이 두근거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지 눈을 감고 기도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끼익끼익 노 젓는 소리만 들려왔다. 배가 제법 육지에서 멀어지자 남자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재식과 함께 온 그 교사의 부인이 안고 있던 아기를 본 모양이었다.

“내가 저번에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아기를 데리고 도망쳤던 모양이야. 그런데 갑자기 아기가 울었대. 경찰이 지나가면 끝장인데 말이야. 그래서 그 아주머니가 아기 입을 막았는데, 너무 세게 막았는지 나중에 보니까 죽어 있더래.” “아이고, 그런 몹쓸 일이 있나.” “그러게 말이야. 근데 저 아기는 울지도 않고 잘도 있네.” “당연히 울면 안 되지. 울면 그길로 우린 끝이야.” “아기가 있는 줄 알았으면 난 이 배 안 탔을 걸세.”

그 순간 바라봤던 아기 아빠, 그 교사의 표정을 재식은 잊을 수가 없다. 아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걱정·체념·오기·슬픔…, 그 모든 것을 다 섞어놓은 표정이었다. 사람이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과 마주하면 어른이라도 저런 표정을 짓게 되는구나.

좀처럼 흐르지 않는 것 같던 시간이 지나가고 안내원이 말했다. “다 왔어요.” 마침내 월남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재식은 그때 어렸던데다 긴장을 너무 했던 탓인지, 배가 도착한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 기억에 없다.

아무튼 배에서 내리니 수많은 사람이 북적대고 있었다. 서로 얼싸안고 있는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 큰소리로 웃으며 떠드는 사람,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는 사람…. 목숨을 걸고 월남에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었다. 재식은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훨씬 편안해졌다.

하지만 ‘드디어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기쁨은 얼마 가지 못했다. 미군 몇명이 손짓을 하면서 사람들을 모두 한곳에 모이게 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 틈에 섞여가면서 재식은 내심 긴장이 됐다. 그런데 다급하게 사람들을 모아놓고도 미군들은 계속 자기들끼리 수다스럽게 얘기를 나눌 뿐이었다. 미군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엄청난 양의 하얀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디디티(DDT·다이클로로 다이페닐 트라이클로로에테인)라 부르던 살충제였다. 졸지에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사람들은 자지러지듯 기침을 해댔다. 북한에서 전염병균이라도 옮아왔을까봐 약을 뿌린다고 했다. 숫제 짐승 취급이었다. 재식은 화가 났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뒤에도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앞쪽에서부터 사람들이 움직였다. 양옆으로 미군들이 보초를 서면서 같이 행군했다. 개성에 있는 피난민 수용소로 가는 길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개성은 당시 남한 관할이었다. 한번 들어가면 언제 나올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 재식은 어떻게든 도망을 쳐야겠다고 결심했다.

재식은 상황을 살펴보다가 대열을 빠져나와 무조건 개성역 쪽으로 내달렸다. 역에 도착하니 마침 서울로 출발하는 기차가 서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기차에 올라탔다.

고 오재식 선생
고 오재식 선생
그렇게 서울역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중이었다. 통행금지 시간이어서 역사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막연히 서성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재식의 손목을 휙 낚아챘다. 놀라 돌아보자, 그 사람은 재식의 손목에 도장을 쾅 하고 찍어 주었다. “급한 모양인데, 이 도장이 찍혀 있으면 통행금지여도 다닐 수 있으니까, 가 봐. 누가 잡거든 손목에 찍힌 도장만 보여주면 통과돼.”

재식은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다행히 아무도 잡는 사람은 없었다. 여관 불빛이 보이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들어갔다. 방에 들어온 그는 통나무가 쓰러지듯 툭 하고 쓰러졌다. 지난 이틀 사이 몇십년이 흘러간 듯했다. 그제야 온종일 죽 한사발 먹은 것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배가 몹시 고팠다. 하지만 상념도 허기도 잠깐이었다. 곧 죽음처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오재식 구술

구술정리/이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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