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원 정치부 기자
김용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최근 박근혜 행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되면서 책임총리네 아니네 하는 이야기가 입줄에 오르고 있다. 그런데 책임총리는 매우 부적절한 용어일뿐더러 현재의 헌법과 정치 제도에서는 존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먼저 책임총리는 근거가 없는 말이다. 헌법에도, 정치학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통상 책임총리란 헌법에 보장된 국무위원 임명 제청권, 해임 건의권을 바탕으로 대통령과 권한을 나누는 총리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책임을 지는’ 총리가 아니라 ‘권한을 갖는’ 총리를 말한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권한총리’, ‘실권총리’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이 겨자씨만한 총리의 권한은 모두 대통령의 권한에 포함돼 있다. 총리의 권한은 대통령이 주면 있고, 안 주면 없다. 총리의 독립적 권한이란 애초에 없다.
또한 한국의 총리는 행정부 운영, 이른바 국정을 책임질 수도 없다. 시민이나 시민의 대의기구인 의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총리는 오로지 ‘대통령의 임명과 명을 받아’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할 뿐이다. 따라서 시민이나 의회는 행정부 운영의 책임을 총리에게 물을 수 없다. 행정부 운영의 책임은 대통령에게 물어야 한다. 총리는 다른 장관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임명한 내각의 일원일 뿐이다. 책임총리라는 말은 언감생심이다.
그래서 책임총리라는 말은 많았지만, 그에 값하는 총리는 거의 없었다. 책임총리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은 김대중 행정부의 김종필 총리 때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 총리는 일부 장관의 임명 제청권을 행사했고, 총리에서 물러난 뒤엔 사실상 후임 총리까지 임명 제청했다. 그러나 김 총리의 권한은 헌법과 제도의 뒷받침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공동정부의 파트너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권한이었다. 또 한 사람의 책임총리로 알려진 이해찬 총리의 권한은 노무현 대통령의 재량권 안에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 정치의 역사를 보면, 행정부 운영의 권한이 없는 총리에게 그 책임만을 뒤집어씌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09년 9월 정운찬 총리는 지명을 받자마자 행정도시(세종시)를 백지화하는 법 개정을 추진했다. 이 일의 실질적 주체는 이명박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 법 개정이 실패하자 정 총리는 사실상 그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연히 이 대통령이 권한을 갖고 추진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졌어야 하는 일이었다.
2012년 6월 ‘한-일 군사비밀정보 보호협정’의 처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청와대와 외교통상부는 이 대통령이 해외 출장을 간 사이 김황식 총리 주재 국무회의에 이를 긴급안건으로 올려 처리했다. 그날 김 총리는 이 안건이 국무회의에 올라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일이 터지자 여론의 화살은 김 총리에게 쏟아졌고, 김 총리는 자신이 알지도 못한 일의 책임을 묵묵히 졌다. 그러는 사이 귀국한 이 대통령은 이 사안의 책임을 물어 청와대의 김태효 대외전략기획관을 경질했다. 대통령은 결코 잘못을 시인하거나 책임지는 법이 없었다.
총리라는 안전판을 이용해 한국의 대통령은 권한은 막강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제왕적’ 위상을 누리고 있다. 반면 총리는 권한은 없고 책임은 막중한,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오래전부터 대통령중심제와 맞지 않는 총리 제도를 폐지하거나 대통령과 함께 선출되는 부통령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해왔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면서도 ‘제왕적 대통령’을 분칠하는 ‘망석중이’ 총리 제도는 하루빨리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와 함께 책임총리라는 허울뿐인 이름도 사라지기를 바란다.
김규원 정치부 기자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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