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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큰딸 여성대통령 / 이유진

등록 2013-02-03 19:26

이유진 사회부 기자
이유진 사회부 기자
1975년, 23살의 ‘대통령 영애 박근혜’는 외신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녀가 평등하게 취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녀평등은 여성해방이나 가두데모가 아니라 ‘보다 더 여성다와짐’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인내·관용·사랑 등과 같은 그들 본래의 미덕을 갖고 있습니다.”(1975년 10월16일치 <경향신문> 7면)

38년이 흘렀다. ‘대통령 당선인 박근혜’는 대선 유세 내내 여성 ‘본래의 미덕’보다 ‘여성해방’에 가까운 언어로 ‘가두데모 하듯’ ‘여성대통령’이 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자는 바깥일을, 여자는 집안일을 하는 성별이분법은 출산·육아·요리·청소·옷손질·가족간호 같은 고된 노동을 공짜로 착취하는 가부장적 구조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당선인과 비슷한 1950년대에 태어나 70~80년대 가족 대신 희생해온 ‘대한민국 큰딸들’에게 박근혜 대통령 취임은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갈 것이다. 유세 때 중고령 여성들이 “여성대통령 꼭 돼 주세요”라며 환대한 건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성역할 뒤집기는 거기까지다. 그가 내놓은 여성정책은 출산·육아 분야에 집중됐다. 국가가 ‘결혼해서 애 낳아 기르는 젊은 몸’으로 여성을 도구화하는 건 유신시절 산아제한운동이나 요즈음의 출산장려정책이나 다를 바 없다. 애 낳고 다 키운 5060 여성들은 특히나 소외돼 그들의 ‘손톱 밑 가시’를 빼줄 정책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도 속시원히 나오지 않고 있다.

2012년 50대 여성 고용률은 58.13%로, 20대 58.08%보다 높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는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월 50만~60만원 손에 쥘 뿐인 비정규 노동직군이다. “집에서 늘 하던 일이니 나가서도 할 수 있겠다”(2012년 ‘성평등 디딤돌상’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홍익대분회 수상 소감 가운데) 싶어 시작한 돌봄노동, 청소용역은 억울하게 일자리 잃기 딱 좋고, 저항하면 비난받는다. 24만명의 요양보호사 대부분은 본인보다 조금 더 나이 많은 노인들의 병수발을 든다. 돌봄노동은 친밀함과 감정노동이 뒤섞여 스트레스 지수가 높고, 육체적으로도 근육통과 관절염 등 각종 통증을 유발한다. 돌보던 노인에게 변고가 생기면 일감 구하기도 힘들다. 그런데도 정부는 한집에서 편하게 근무하려 하지 말고 여러 집을 돌아다니면 임금이 확보된다며 속 터지는 얘기나 하고 있다.

한국 남성노인 소득빈곤율(중위소득 50% 이하 인구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 3배가 넘는 41.8%다. 여성은 회원국 최고인 47.2%로 2명 중 1명꼴이다. 가난한 중고령자 여성들은 딸로 태어나 오빠와 동생들한테 학교를, 남성들한테 더 좋은 일자리와 더 많은 임금을 양보했다. 늙고 병들어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아봤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자식이 발견됐으니 더 가난한 노인에게 양보하라면서 국가가 ‘공짜복지’를 빼앗아가기 일쑤다. 워킹푸어를 탐사보도한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렌라이크의 말대로 그들은 남들을 돌보려고 평생 ‘주고 또 준다’. 이런 빈곤과 돌봄의 여성화가 여성대통령에게는 불쾌하지 않은가, 아니면 그는 정녕 큰딸들의 중층적인 고통을 못 보는가.

당선인한테 바랄 수밖에 없다. “여성대통령이 돼달라”고 부탁했던 동년배 여성들의 시든 얼굴을 기억한다면, 보상을 아껴온 법과 제도에 대해 중고령 여성의 대표성을 갖고 성난 얼굴로 돌아봐야 한다. 참고 견디는 ‘여성의 미덕’을 계속 발휘하기에 그들은 너무 지치고 분노에 차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젊은 여성 다수의 미래다.

이유진 사회부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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