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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잘 알지도 못하면서 / 민규동

등록 2013-02-06 19:50

민규동 영화감독
민규동 영화감독
포항역 근처에 중앙대학교라는 곳이 있었다. 고교 시절 한 절친은 참고서를 팔아 그 대학교를 뻔질나게 넘나들었다. 그곳이 사창가란 걸 알게 된 후, 난 타락한 창녀들이 뭐가 그렇게 좋냐고 캐물었다. 그는 내게 <춘희>라는 소설책 한 권을 던져줬다. 난 꺽꺽 울면서 책을 덮었고, 그들이 어떤 처지에서 살아가든 고귀한 인간임은 분명하다고 깨달았다. 책 한 권에 무너지는 나의 관념, 그것은 얼마나 얇고 가벼운 것이었을까.

얼마 후, 나는 세조의 업적 발표라는 국사 과제에 맞춰 도서관을 뒤졌다. 왕권 강화, 부국강병, 법전 편찬, 불교 중흥에 천문학까지 얼마나 많은지, 책에 없는 행적까지 꼼꼼히 조사해 발표했다. 선생님의 칭찬에 사뭇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 그 절친이 이어 발표했다. 세조는 어린 왕자를 무참하게 죽이고 햄릿의 삼촌처럼 쿠데타로 왕이 된 자이고, 재임 시절 좋은 일이 다 그의 업적이라면, 그 기간의 나쁜 일 또한 모두 그의 흉이 아니냐고 했다. 광주를 짓밟은 전두환이 올림픽을 유치했다고 그것을 업적이라 칭하는 게 맞냐고 과제 자체를 비난하며, 자기 정당화를 위해 읊어대는 권력가들의 용비어천가에 속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어디서 저런 생각이 샘솟는 걸까, 머릿속에 띵 종이 울렸다. 역사라고 하면 연도나 달달 외우던 난 그때의 충격 이후로 역사책 속에 숨겨진 여러 결들을 해독하는 눈을 갖게 됐다.

겨우 한 방울에 넘치는 컵 속의 물처럼, 옳다고 믿는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일은 개인뿐 아니라 집단적인 경험이 되기도 한다. 마징가 제트는 최고의 인기 응원가였다. 어느 격렬한 한-일전 때, 한국인의 마징가 열창에 의아해하는 일본인의 지적이 있고, 그것이 일본 만화란 걸 알게 된 우린 황망함 속에서 그 노래를 퇴출시켰다. 이런 크고 작은 붕괴가 계속되다 보면 진리의 기준에 대한 불신이 커져 점점 섣부른 판단을 경계하게 된다.

예컨대 정보가 제한적일 북한의 경우는 만년 전 인류의 발자취보다 더욱 어려운 대상이다. 어려서 그곳은 굶주림과 피부병과 숙청이 난무하는 지옥이라고 배웠고, 반공포스터 경연은 늘 잔혹한 이미지의 향연이었다. 언젠가부터 북한도 사람 사는 곳이란 당연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 감탄의 형식은 유치하게도 이런 식이다. 북한에도 지하철이 있다니. 응원단 여성들이 이렇게 예쁘다니. 컴퓨터도 있다니. 롤러블레이드를 타다니. 실내수영장이 있다니. 국제영화제가 있다니. 로켓까지 쏘아 올리다니. 이런 식의 전복은 뭔가 알아냈다고 하기엔 너무 일천한 경험이다.

혹자가 이런 말을 던졌다. 북한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성차별은 남한보다 더 심할 것이다. 죽어본 적은 없지만, 지옥은 끔찍할 것이다라는 유의 궤변이다. 요사이 오피니언 리더 사이에 극단적 부조리의 비유로 북한에 대한 경멸을 덧붙이는 묘한 지적 센스의 과시 경향이 있다. 그들이 정말 뭘 좀 아는 걸까. 안다면 얼마나 아는 걸까. 그것이 혹 김일성은 돼지라고 배운 똘이장군 세대의 뇌세포에 눌어붙은 반공 이데올로기의 찌꺼기는 아닌지 어목연석의 빈혈을 겪게 된다.

남한의 로켓은 치적인데 북한의 로켓은 횡포라는 식으로, 이혼한 지 60년 내내 저쪽 집안에 대해 한마디 칭찬도 불허하며 오로지 험담만을 부추기는 이쪽 집안의 습관적 냉소가 평소 깊은 안목의 진리를 설파해주는 소크라테스들조차 오염시킨 건 아닐지. 하여 그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어느 날, 무의식적 마녀사냥에 동참한 걸 뒤늦게 깨닫고 집단적 후회를 하는 건 아닐지 염려된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처럼 기적적인 경험 끝에 깨닫는 방식 말고라도, 단순하게 매번 혜안의 종을 울려주던 옛 친구의 한마디가 그리울 때가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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