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 경제부 기자
“미국, 일본 등이 ‘자기들의 숙제’를 하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숙제’를 해야 할 시기다.”
최종구 기획재정부 차관보가 지난달 31일 이른바 ‘한국형 토빈세’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한 말이다. 뭔가 비장미까지 감도는 멋진 표현이지만 이렇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좀 오래전에 나온 숙제 아닌가요?”
‘토빈세’(외환거래세)는 미국의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 교수가 1972년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을 막기 위해 제안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미국 사람이 한국 주식에 투자하려면 달러를 원화로 바꾸고, 주식을 팔고 나가려면 원화를 다시 달러로 바꿔야 하는데 그때마다 투자액의 일정 비율, 예를 들어 0.5% 정도를 세금으로 떼자는 것이다. 그럼 조금만 이익이 나도 주식을 샀다 팔았다 하며 외환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국제투기세력들이 조금 진중해지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는 아이디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체로 ‘좌파’ 성향의 학자와 정부, 시민단체 등이 지지하고, 시장주의 내지 ‘신자유주의’ 진영과 국제금융자본 세력이 반대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정치적 이념과 논리적 연관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강만수 전 재정부 장관이 지지를 표방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2008년 서브프라임발 금융위기가 터지자, 토빈세 지지 목소리는 좌우를 가리기 더욱 힘들어졌다.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자본시장 자유화의 전위대였던 국제통화기금(IMF)이 ‘자본통제’가 필요하다고 돌아선 대목일 것이다.
하지만 2008년 위기 이후에도 우리 정부 안에서 토빈세는 일종의 ‘금기어’였다. 외환규제를 담당하는 공무원들과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이번에도 큰일날 뻔했는데 뭔가 근본적 조처를 취해야 하지 않나요?” “그래야지. 다 검토하고 있어.”
“토빈세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토빈세? 잘못하다가 나라 망해.” “왜요? 브라질도 하던데….” “거기야, 천연자원이 많잖아. 외국자본 없어도 먹고사는 나라야.”
“프랑스도 주장하던데….” “유럽 안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좀 두고 보자고. 어쨌든 다 같이 하면 모를까 우리만 할 수는 없어. 달러가 싹 빠져나가 버리면 어떻게 할 거야?”
대외개방도가 유난히 높은 경제상황을 고려한 ‘신중한’ 접근일 수도 있지만, 뿌리깊은 시장주의적 사고방식이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토빈세는 사실 그리 ‘과격한’ 정책이 아니다. 토빈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과도하게 효율적인 국제 금융시장의 수레바퀴에 약간의 모래를 뿌리는 것’이다. 바퀴를 멈추자는 게 아니라 속도를 조금 늦추자는 것이다. 더구나 1997년에는 외환위기로 나라가 ‘망할’ 뻔했고, 2008년에는 그 문턱까지 갔던 나라가 토빈세 정도를 검토하는 게 과격한 건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는 것이 과격한 건지 헷갈리는 노릇이다.
이런 점에서 최 차관보가 정부 차원에서 처음으로 토빈세 검토를 언급했을 때, 한편으론 격세지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한편에선 ‘참 오래 걸린다’ 싶기도 했다. 그사이 유럽 11개 나라는 내년부터 금융거래세를 시행하기로 결정했고, 아이엠에프는 지난해 11월 자본통제 정당성을 인정하는 공식보고서를 내놓았다.
사실 정부가 뒤늦게나마 ‘숙제’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 정말 외환시장 변동성을 막으려는 건지, 최근 ‘환율전쟁’ 탓에 많이 떨어진 원-달러 환율을 다시 높여서 수출 대기업을 도와주려는 것인지(‘토빈세 검토’ 발언은 환율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잘 모르겠다. 다만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더라도 제사만은 확실하게 지내길 바랄 뿐이다.
안선희 경제부 기자 s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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