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연금제도는 누가 처음 생각해냈을까? <로빈슨 크루소>를 쓴 18세기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라는 주장이 있어 이채롭다. 하지만 영국에서 공적연금 제도가 실제로 도입된 건 거의 2세기 뒤인 1908년 무렵이었다. 첫 반향은 뜨거웠다. 가난한 노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연금 지급처인 우체국으로 달려갔으며, 일부는 접수창구의 소녀들에게 사과나 꽃을 선물했다. 훗날 한 학자는 “어떤 정부의 조처도 그렇게 많은 순수한 행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평했다.
복지국가 하면 대체로 윌리엄 베버리지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보다 30여년이나 앞서 영국 복지국가의 토대를 쌓은 인물이 있다. 바로 연금제도를 도입한 정치인 로이드 조지다. 자유당 소속인 그는 1911년엔 건강보험과 실업보험을 도입하는 데도 큰 구실을 했다. 그뿐이 아니다.
법제화한 노령연금과 건강보험, 실업보험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 ‘국민의 예산’이란 이름의 획기적인 재정방안을 마련했다. 핵심은 파격적인 세제개혁이었다. 구체적으로 고소득자에겐 증세를, 가난한 자에겐 세금감면을 하도록 했으며, 토지소유자들에 대한 과세 신설과 누진세 적용 등 증세안도 포함됐다. 격렬한 찬반 논쟁이 뒤따랐지만 이 예산안은 1910년 4월 하원과 상원에서 통과됐다. 이로써 세수는 늘었고, 사회보장제도 실현을 위한 복지재정이 확보됐음은 물론이다.
‘박근혜 복지’가 정부 출범도 하기 전인 인수위원회에서 퇴색하고 있다. 핵심 공약인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국가부담’은 비급여를 제외해 팥소 없는 찐빵처럼 됐고, ‘65살 노인 기초연금 2배 인상(20만원)’도 볼썽사납게 될 모양새다. 공약 수정, 아니 약속 위반이다. 당선인과 인수위 쪽의 명분은 재원이다. 재정현실에 맞게 공약을 재조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태도인데, 그럴싸해 보여도 진정 복지를 하려는 의지가 있었는지 묻고 싶다. 당선인은 공약집에서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이 세계 최악이니 65살 이상 노인 모두에게 기초연금 도입을 약속했고, 의료비로 가계가 파탄 날 지경이라며 진료비 국가부담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기실 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의지다. 그 의지의 잣대가 복지공약 준수를 위한 노력인 것이다. 재원은 수단일 뿐이다. 목적과 수단이 전도돼선 안 된다.
복지재정의 획기적 확보, 물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출범 전부터 재정현실을 들어 공약 후퇴가 이뤄진다면 초심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복지재정은 결코 경제관료나 재정전문가들의 숫자놀음이어선 안 된다. 그것은 서민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와 시대적 요구의 반영이어야 한다. 대안은 있으며, 그것을 찾는 게 정치다.
곧 출범할 박근혜 정부가 진정 복지를 하겠다는 뜻이라면, 복지공약을 위한 획기적인 재정방안을 새롭고 면밀히 짜는 일에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른바 ‘박근혜 복지를 위한 국민의 예산’ 방안을 마련하는 것일 게다. 공약집에서 밝힌 재원조달 계획대로 올해부터 당장 비과세 감면 축소, 지하경제 양성화, 세출구조조정을 차근차근 실현하는 게 일차적으로 할 일이다. 2014년 예산안에는 이런 계획이 어느 정도 수치로 담겨야 할 것이다. 내년도 예산안은 이런 면에서 박근혜 복지의 실체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부가가치세 인상이나 사회복지세 신설 등 증세를 통한 복지재정 확보에 대해서도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한다. 공약이 준수되고 획기적인 세제개혁을 포함한 복지재정 방안이 마련돼 현실화한다면 아마 ‘박근혜 복지’는 국민들에게 ‘순수한 행복을 주는 정부 조처’로 찬사를 받을 것이다.
이창곤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소장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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