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동 영화감독
삼일절이 무심결에 스쳐 지나갔다. 태극기를 어디에 뒀는지 뒤져보지도 않았다. 휴일이니 관객이 평소보다 많이 들 거라는 실용적 추리를 했을 뿐, 예전에 늘 엄습하던 약간의 죄책감도 없었다. 저녁 6시가 되면 어디선가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무조건 동작 그만으로 경례를 하던 시절엔 상상도 못했던 불온한 게으름이다. 문득, 국경일마다 찾아오는 이 묘한 감정이 권태라는 걸 깨달았다.
왜일까. 해를 더할수록 몰랐던 진실들이 알려지고, 과거에 대한 경각심이 커져야 할 텐데, 실상은 그 반대이고, 김구나 안중근 같은 단골 영웅이 뻔한 애국심 고취의 연례행사에 무심히 초대될 뿐, 일본에 대한 적의도 습관의 영역으로 들어가버린 탓이다.
이럴 땐 알랭 드 보통이 언급한 마네의 <아스파라거스>의 위대함이 떠오른다. <풀밭 위의 점심>처럼 나체의 여인이 빤히 관객들을 노려보며 도발하진 않지만, 한 다발로 묶인 아스파라거스는 어느 때보다 생생히 시선을 끈다. 무릇 위대한 예술은 기존 질서에 맞춰 사고하길 거부하고, 익숙한 사물을 평범하게 지나치는 나쁜 관찰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감각이 무뎌진 굳은살을 보고 있자니 이런 예술적 질문이 떠오른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왜 나쁜 일인가. 자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영령에게 경외감을 표하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되는가.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비난의 표적인데, 만약 임진왜란 때의 전범들이라면 괜찮은 문제인가. 혹시 우린 그게 나쁜 거라고 계속 들었기 때문에, 그냥 나쁘다는 편의적 인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자동인식 시스템처럼, 같은 강도로 그 반대를 당연하게 배운 사람들의 사고 체계를 이 단순한 손가락질로 과연 바꿀 수 있는 걸까.
난 고구려의 기상에 대해 늘 뿌듯해했다. 하지만 고대 전쟁의 잔혹함을 깨달은 후부터는 만주 너머에 우뚝 선 광개토대왕비의 풍경이 혐오스러워졌다. 그 비석은 무력으로 남의 땅을 침범해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하고 마을을 불태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광개토대왕을 자랑스러워한다면, 일본인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일본과 산둥반도까지 세를 확장했던 4세기 백제의 과거를 흠모한다면, 그들은 대동아공영을 완성한 70년 전을 그리워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은 제대로 된 침략의 역사를 갖지 못했기에 어떤 나라보다 평화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우린 아무 상관도 없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해 침략군의 멍에를 썼다. 베트남을 잊을 만할 때, 절대 다시 없을 것 같았던 파병이 또 감행됐다. 걸프전을 넘어 대량살상무기라는 뻔뻔한 거짓말을 내세운 이라크전에서까지 침략자로 등극했고, 힘센 자의 편에 서면 남는 게 많다는 천박한 철학적 교시가 대한민국실록에 새겨졌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베트남이나 이라크 국민에겐 한국 정치인들의 국립묘지 참배는 어떤 의미일까. 만약, 그들이 자신들에게 총부리를 겨눈 자들의 영혼에 묵념을 취하지 말라고 다그친다면, 우리는 콧방귀나 뀔 것인가. 혹은 광개토대왕비를 부숴버리고, 역사책을 고쳐 반성의 새 교육을 시도할 것인가.
팔레스타인을 폭압하는 이스라엘과 신나게 무기거래를 하면서도 반전을 명분으로 일본을 비난하고 있다. 우리에게 그들을 비난할 자유가 있다면, 우리 자신을 비난할 자유도 있어야 한다. 식민지 수탈로 부를 쌓은 강대국들과 수천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중국 그리고 전쟁광인 미국의 야스쿠니를 향한 자가당착을 비난할 자유 또한 있어야 한다.
태극기를 꺼낼 때마다 각성의 나이테가 하나씩 늘어나면 좋겠다. 그것이 국경일 권태의 탈출구일 것이다.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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