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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빨간 한복과 타자들 / 이유진

등록 2013-03-10 19:18

이유진 사회부 기자
이유진 사회부 기자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날 입은 빨간 두루마기와 치마저고리를 보고 복잡한 심경이었다. 광화문 행사 때의 빨간 두루마기 위엔 금박 꽃이 찬란하게 피었다. 그날 만찬에서 선보인 빨간 치마저고리는 한복의 소박함보다는 화려함이 강조됐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누군가는 “예쁘다”고 감탄했지만 누군가는 “곤룡포 같다”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내 생각을 말하자면, ‘레드 콤플렉스’가 맹위를 떨치는 한국 사회에서 금박 입힌 위아래 빨간 한복은 이 나라 보수의 수장인 그에게만 허락된 차림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의 카리스마 있는 옷차림에서 기대감도 느꼈다. ‘약속은 지킨다’던 그의 말이 빨간 옷 못잖게 강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핵심 공약은 취임 초기부터 흔들리고 있다. 빨간 한복처럼, 권력자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무채색의 ‘타자’로 만들어버리려는 건 아닐까 싶다. 취임식날 박 대통령은 국공립 어린이집을 확충해달라는 사연을 읽고 “제가 꼭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지난 6일 보건복지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진영 후보자는 “국공립 어린이집을 한꺼번에 많이 만들 순 없다”고 물러섰다. ‘4대 중증질환 진료비 전액 보장’ 공약이 후퇴한 것 아니냐는 질의에도 “캠페인으로 짤막하게 쓰다 보니까 자세히 설명을 못 했고 그 뒤에 보도자료를 냈다”고 답했다. 기초연금을 도입하면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불리해질 수 있다고 지적하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안은 다음 정부에 건의하는 정도”라고 둘러댔다. 그의 답변은 언론과 국민들을 나 몰라라 하고 인수위 부위원장을 지낸 자신을 뺀 다른 이들 모두를 타자로 만들어버렸다.

새 정부의 여성 장관 기용도 여성계 전체에 좌절감을 안겨줬다. 초대 총리 및 장관 후보자 18명 중 여성은 단 2명으로 고작 11.1%에 그쳤다. 공공기관 여성 임원 비율 30% 의무화를 추진하겠다고 한 약속에 견주면 너무도 실망스럽다고 보수·진보 여성단체들이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지난 4일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조윤선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여성정책 전문성이 없다고 지적받자 “아이를 키우고 일을 했던 여성으로서 문제점을 경험했다”고 반박했다. 여성이 배제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를 알고 기존 정책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나도 같은 워킹맘’이라며 엉뚱한 답변을 한 셈이다. 여성가족정책이 워킹맘만을 위한 것도 아니며, 워킹맘 누구나 장관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약속은 지킨다’는 대통령과, ‘그 약속이 아니었다’는 관계부처의 해명이 서로 다를 때 국민들은 혼란에 빠진다. 말이 달라지는 건 대개 사실을 회피하기 위해서고, 약속을 위반하면 관용의 미덕은 약자에게 강요된다. “국공립 어린이집도 중요하지만”이라고 장관이 토를 다는 순간, 국공립 어린이집 확충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는 삭제된다. “보도자료를 냈다”고 강조하면, 선거구호만 믿던 유권자들은 무지한 자로 배제된다. 한해 수억을 생활비로 쓴다고 지적받은 장관 후보자가 ‘나도 일반적인 워킹맘’임을 강조하자, 일상적 차별에 시달리는 워킹맘들과 워킹맘 아닌 여성들까지 ‘멘붕’이 됐다. 이에 지난 3·8 여성의 날에 여성 비정규직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장애인들은 공약 후퇴라며 규탄시위를 벌였다.

개별 국민들의 바람이 꼭 옳을 수도, 하나일 수도 없다. 그러나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의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하겠다던 언약을 버리고 희생을 강요해선 안 된다. 부디 대통령의 빨간색 두루마기가 훗날 백성 위에 군림하는 왕의 상징인 ‘곤룡포’가 맞았다며 탄식하지 않게 되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있다.

이유진 사회부 기자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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