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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야! 한국사회] 대통령의 피, 과학자의 피 / 김우재

등록 2013-03-11 19:22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서양엔 유명한 과학자 집안이 많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는 유명한 생리학자였고, 사촌 프랜시스 골턴은 통계학의 기초를 세웠다. ‘다윈의 불독’ 토머스 헉슬리의 손자 줄리언은 동물학자이자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고, 앤드루는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퀴리 부인 집안도 과학자 천지인데, 남편 피에르를 비롯해 딸인 이렌, 이렌의 남편 프레데리크 모두 물리학자였다. 불확정성 원리로 유명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아들 마르틴도 유명한 초파리 유전학자다.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2009년 노벨생리의학상은 텔로미어(말단소체)를 발견한 세 명의 과학자에게 돌아갔는데, 모두가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이들 중 엘리자베스 블랙번 교수의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모두 호주의 유명한 지질학자였다고 하니, “유전자 속에 과학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는 말도 과장은 아닌 듯싶다.

한국에도 유명한 집안이 많다. 직업만 다를 뿐이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가의 자손들은 대를 이어 경영자가 된다. 의사와 변호사 집안은 아주 흔하다. 유명한 연예인과 음악가들도 대를 이어 직업을 계승하며, 국회의원 집안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이다. 그리고 이제 대통령도 대물림되는 직업이 되었다.

자식이 부모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하고, 이를 대물림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어느 사회에나 안정적인 직업군은 존재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가 그런 직업을 선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그런 욕망이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왜 한국 사회에는 과학자 집안이 없느냐’는 구조에 있다. 여기에 한국 사회가 지닌 대부분의 모순이 녹아 있다.

문제는 단순하다. 과학자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과학자라는 직업이 불안한 것이다. 한국 과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가 수십년째 보여주는 일관성이 있다. 그들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연구를 위한 최소한의 직업적 안정성을 원할 뿐이다. 한국 사회는 그러한 조건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한국을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을 결코 과학자로 키우지 않겠다고 답한다.

한국 과학의 요람인 카이스트는 어느새 의사와 변호사 양성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공계 기피현상을 막겠다고 만든 이공계 장학금은 고스란히 의사와 변호사 준비자금으로 쓰였다. 과학자는 가난하고 불안정한 직업이다. 카이스트 학생들과 과학자로 사는 부모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직업군은 한정되어 있다. 그런 직업들은 자랑스럽게 대물림된다. 과학자는 그런 직업이 아니다.

해결책도 단순하다. 과학자로 사는 것이 행복하면 된다. 부모가 자식에게 과학자라는 직업을 추천할 수 있으면 된다. “돈은 많이 벌지 못하지만, 굶지 않고 안정적으로 연구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과학자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된다. 비단 과학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소설가, 번역가, 독립영화 감독, 연극인, 가난하다 여겨지는 직업이 대물림되는 사회, 다양한 직업들이 안정적으로 자부심 속에서 유지되며 직업적 쏠림이 없는 사회, 그런 사회가 건강하다.

박근혜 정부는 과학기술을 정치적 화두로 내세웠다. 국민행복을 위해서는 창조경제가, 창조경제를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필수적이라는 논리다. 그런데 어디에도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미래창조과학부라는 명칭은 과학으로 미래를 창조하겠다는 뜻일 텐데, 주인공은 과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먼저다.

국민행복을 위해 과학자가 희생하는 시대는 지났다. 과학자도 국민이다. 과학자가 행복한 사회에서 국민도 행복할 수 있다. 한 사회의 과학은 그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김우재 초파리 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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