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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그들이 결속하는 법 / 한귀영

등록 2013-03-24 19:27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혹한의 추위를 견디며 살아가는 이누이트족에게는 놀라운 접대문화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주인은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위해 자신의 아내를 내주는 ‘선물’을 베푼다. 손님은 이 강력한 호의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호의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내를 공유한 사내들은 더욱 강력한 유대감으로 결속하게 된다. 물론 이는 극한적 상황에서 종족의 생존을 위한 방편이었으리라.

고위 공직자 등 한국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기업인의 별장에서 주지육림을 방불케 하는 성접대를 받아왔다는 스캔들로 세간이 떠들썩하다. 낯부끄러울 정도로 땅에 떨어진 지배층의 도덕성 수준을 질타하는 입바른 목소리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도덕성이라는 프리즘은 지루하다. 게다가 훨씬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놓치게 된다. 도덕의 잣대로 접근할 때 이 사건은 한갓 스캔들일 뿐이지만, 이들의 접대문화가 지닌 선물경제적 본질에 주목한다면 의미심장한 경제학적 증례가 된다.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이래로 선물경제에 대한 수많은 연구들은 자본주의적 시장교환과 선물교환이 지닌 차이를 명료하게 정식화하고 있다. 시장교환은 주고받기가 강제된 의무지만, 선물교환에서는 선물도 답례도 의무가 아니다. 아낌없이 먼저 주는 것이 선물인데, 받은 사람은 돌려줄 의무가 없는데도 자발적으로 답례를 하게 된다. 또한 시장교환은 원리적으로 등가교환이지만, 선물의 경우엔 똑같은 가격의 물건으로 답례하면 큰 실례가 된다. 선물교환에서 답례는 받은 것보다 조금 더 큰 가치를 담는 것이 이상적이다. 선물이 반복되면 주고받는 선물의 가치 또한 점차 증식하게 된다.

선물경제는 이렇게 유쾌한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달성한다. 선물교환이 지닌 이 독특한 특징들은 교환되는 것이 물건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선물교환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음으로써 강력한 인격적 결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번 성접대 사건을 비롯해서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고위층의 접대문화를 보면, 선물경제의 특징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접대를 하는 기업인들은 언제나 순수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선물을 하는 것이어서, 결코 대가를 바라지 않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받은 사람은 기꺼이 선물을 받았다가 이윽고 때가 되면 더 큰 대가로 답례를 치르는 미덕을 보여준다. 이들이 주고받는 것은 물건이라기보다는 마음인 것이며, 그 주고받는 물건이 은밀하거나 용납되기 어려운 것일수록 그들 사이의 결속의 정도는 높아질 것이다.

그들의 추잡한 접대문화를 고귀한 선물경제에 빗대 설명한다고 노여워하지 마시길…. 애초에 선물경제가 그렇게 고귀한 것만은 아니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들 사이의 거래는 선물경제의 정의에 완벽히 부합한다. 그리하여 이번 사건은 한국 사회 지배층을 강력히 결속하게 만드는 근본 동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풍부한 텍스트로 봐야 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등가교환에 입각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열렬히 찬미해왔지만, 사실 폐쇄된 자신들만의 세계에서는 선물경제를 신봉하고 그것을 통해 강력히 결속해온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선물경제가 지닌 경쟁력,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 사건이 주는 교훈은 ‘분노하라’가 아니라 지배층이 지닌 힘의 원천을 ‘배워라’인 것이다. 그들의 공고한 선물경제에 뒤지지 않을 서민의, 민중의 선물경제를 구축함으로써 우리도 결속하고 연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렛츠 같은 지역화폐운동,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 사회적 경제를 통해 많이 선물하고 더 많이 답례하자. 우리도 그들처럼 결속 좀 해보자.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hgy421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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