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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병찬 칼럼] 맡겨진 운명의 비애

등록 2013-04-03 19:18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1994년 1차 북핵위기 당시 미국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식 정밀공격을 구상했다. 게리 럭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은 이 계획을 워싱턴에 보고했다. 북한이 전면전으로 대응할 경우, 하루 만에 군인 20만명을 포함해 수도권에서만 150만여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개전 1주일 안에 미군과 남북한 병력이 최소 100만명 사망하고, 민간인 사상자는 500만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끔찍한 예측은 이 보고서에 포함돼 있었다.

당시 미국의 반핵 환경단체 천연자원보호협회(NRDC)가 정부 비밀문서를 입수해 분석한 내용은 더 끔찍했다. 북한이 2차 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보이급(15㏏) 핵폭탄을 용산의 지표면에서 폭발시킬 경우 직접적인 사망자만 125만명에 이르리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지만, 당시 김영삼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북한을 설득할 수도 없었고, 미국을 제지하지도 못했다. 계획을 중단시킨 건 럭 사령관이었다. 그때 한국민의 운명은 미국과 북한에 맡겨져 있었다.

엊그제 북한은 1차 핵위기의 원인이었던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하겠다고 발표했다. 6자회담 합의에 따라 2008년 6월 불능화 조처가 취해졌던 시설이다. 한반도 긴장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어제는 개성공단 입경도 금지시켰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반도를 콕 찍어, 대립의 해소를 간절히 염원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하지만, 이번에도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지난 한 달 동안 정부는 속수무책으로 미국과 북한 사이의 치킨게임을 지켜봤다.

3월6일 북은 한-미 연합 훈련인 키리졸브 시작(11일)과 함께 정전협정을 백지화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과의 불가침선언도 폐지하고, 군 통신선도 단절하겠다고 했다. 뒤에 밝혔지만, 미군은 8일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전략폭격기 B-52를 괌에서 한반도로 발진시켰다. 북한은 11일 예고했던 조처들을 취했다. 정전협정이 백지화되면 한반도는 형식적으로 6·25전쟁의 연장 상태로 들어간다. 미군은 19, 25일 두 차례 더 B-52를 출격시켰다. 20일에는 핵잠수함 6900t급 샤이엔이 부산항에 입항했다. 비-52가 세 번째 출격한 다음날(26일) 북한은 전군에 1호 전투근무태세를 발령했다. 28일 미군의 최첨단 스텔스 전략폭격기 B-2가 미국 본토에서 발진해 한반도에서 폭격훈련을 실시했다. 29일 0시30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는 전략미사일부대에 발사대기를 명령했고, 30일엔 남북은 전시상황이라고 선언했으며, 개성공단 폐쇄 가능성을 예고했다. 미군은 31일 세계 최강이라는 F-22 스텔스 전투기를 일본 가데나 기지에서 발진시켜 한반도에서 공대공, 공대지 훈련을 벌였다. 이 사실을 미군이 1일 발표하자, 2일 북한은 영변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했고, 3일엔 개성공단 입경을 금지시켰다.

북은 남쪽을 인질 삼아 협박 수위를 높이고, 미국은 무력시위를 끝없이 강화하며 북을 압박했다. 그 틈에서 한국 정부가 한 일이라곤 기껏해야 ‘도발시 강력 응징’ 경고뿐이다. 그러나 인질이 인상 쓴다고, 겁먹을 인질범은 없다. ‘맡겨진 운명’은 비참하다. 한반도의 역사가 그러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모두 한반도와 인근 해역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6·25전쟁은 동서 냉전의 대리전으로 전개됐다. 심지어 박정희, 전두환 정권마저 남북관계의 개선을 통해 한반도 위기관리 능력을 키우려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특히 민주정부들은 남북의 호혜적 의존성을 키워, 한국민의 운명이 남에게 맡겨지는 일이 없도록 애를 썼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그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맹목적인 대결과 압박으로 남북관계를 철저하게 파탄시켰다.

평화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제 운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쟁 억지에 쏟아붓는 것에 비하면 훨씬 생산적이고 저렴하다. 박근혜 정부가 신뢰 구축과 지속가능한 평화의 정착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건 다행이다. 더 적극적이고 파격적인 조처들을 기대한다. 상황이 위중하다.

곽병찬 논설위원,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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