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동 영화감독
1999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할 때, 한 해 전 봄날, 청량리의 20층 아파트에서 함께 뛰어내린 4명의 여중생 사연을 떠올렸다. 어느 흉측한 귀신보다 매년 청소년 180명이 자살한다는 통계가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리 유서를 쓰고, 소지품도 교환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만류하는 친구들과 껴안고 흐느꼈지만, 굳게 결심한 4명은 친구들을 뿌리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교복과 신발을 가지런히 놔두고 3명이 먼저 뛰어내렸고, 주저하던 한 명도 결국 뛰어내렸다. 죽기 직전을 함께했으니 짧은 순간이라도 덜 외로웠을까, 그 고독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뉴스는 고등학교 시절 한 여중생 후배를 떠올리게 했다. 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술 마시러 나갔던 친구들이 5층 아파트에서 추락한 채 신음하는 그 학생을 발견했다. 다행히 아주 건강한 아이였기에 기적적으로 회복해 다시 학교에 나왔다. 그 아이처럼 죽음으로 탈출을 꿈꿨다가 실패한 이가 또다시 탈출을 시도하는 경우는 드물어 보인다. 분명 죽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뛰어내렸던 여중생 후배가 살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옆 반의 한 남학생이 목을 맸다. 얘기 한 번 나눠보지 못한 낯선 친구였다. 처음 얼굴을 제대로 본 건, 어느 조회 날 그가 독서상을 받으러 교단 위로 올라갔을 때다. 알고 보니 그 빼곡한 학교 도서관 카드를 3번이나 바꿔 치우며 전교에서 가장 책을 많이 빌려본 학생이었다. 하얗게 빈 자리만 가득한 내 독서카드를 부끄럽게 만들었던 그가 집 뒷산에서 자살한 것이다. 충격적인 소식에 우리는 바로 검은 리본을 달았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바로 리본을 금지시켰다. 전날 담임교사와 진로 문제로 다퉜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유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얼마 후 난 도서관을 찾아가 그 친구의 도서 대출 리스트를 찾아내려 애썼지만,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껏 궁금하다. 그는 과연 무슨 책들을 읽었을까. 그가 엿본 옛 성현의 지혜가 어떤 것이었기에 그렇게 떠나버린 걸까. 현실이 천국의 양념을 살짝 친 지옥이니, 죽는다는 게 막연히 슬픈 것만은 아니라는 인생의 비밀이었을까.
보잘것없는 영화 한 편이 옥상으로 향하는 그들의 외로운 발길을 되돌리는 기적을 행할 수 있을지 질문해 보았다. 과연 우울증, 가족 불화, 가난과 성적 비관, 따돌림 등, 늘 오르내리는 그 사연들만 이고 떠난 것일까. 그렇게 짚어낸 표피적인 통계로 그들 삶의 이면들을 얼마나 눈치챌 수 있을까. 분명 다른 비밀이 더 있을 것이라 믿었다. 왜냐면 그들 대부분은 자신이 겪는 불안과 고통을 제대로 표현해낼 언어를 미처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거꾸로 자살 자체가 이미 어른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언어일지도 모른다.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더 못 견디겠어요.” 며칠 전 내 고등학교 후배가 세상을 뜨며 이런 말을 남겼다. 그 서글픈 한 문장에 26년 전 친구의 죽음 때 터뜨리지 못했던 눈물이 용암처럼 북받쳐 올랐다. 어떤 뻔뻔한 이들은 차가운 머리만으로도 잘 살아가지만, 또 어떤 유약한 이들은 뜨거운 심장 없인 살아가지 못한다. 절박한 그들의 언어를 속 깊이 이해 못 하면 우린 또다시 뻔한 원인 분석에 갇혀 규격화된 애도밖에 못할 것이다.
어쩌다 보니 난 그 지옥 터널을 통과해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당장 죽고 싶어하는 아이가 내게 살아남은 비결을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현실이 아름답다고 속일 수도 없고, 또 천국이라는 혁명을 안겨주지도 못하는 처지에, 그래도 희망을 선물하려 쳐도, 그저 버티라는 말 한마디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 이 못난 심장이라니!
민규동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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